수술 전까지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에 글을 쓰다 보니, 오늘의 제목은 어제의 ‘영화 인생’에 이어 ‘커피 인생’이다. 시리즈물이 나오겠다. 당근 케이크 인생, 독서 인생, 수다 인생, 미드 인생, 일기 인생….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벤티 사이즈 카푸치노가 한 손에 들려 있지 않으면 심하게 허전하고, 가끔 정신 차려보면 책상 위에 수북하게 커피잔이 쌓여 있고는 한다. “커피 한잔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일단 다 좋은 사람들로 보이고, 밤에 쉽게 잠이 들지 못하는 이유는 나의 과도한 상상력 때문이지 카페인 때문이 아니라고 덮어놓고 커피의 무죄를 주장하고 싶어 하는, 나는 그런 커피형 인간이다.
커피가 좋아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다. 특히 뉴욕 어학연수 시절의 아침이 기억에 남는다. 깜깜한 새벽, 일하는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연다. 차가운 열쇠와 얼음 같은 쇠문 때문에 늘 손이 깨질 만큼 시렸다. 곧 곱슬머리 스페니쉬 아저씨가 배달해주는 로스팅된 원두 포대를 터억 받는다. 그걸 내 키보다 큰 대형 그라인더 기계에 힘껏 끌고 올라가 원두를 탈탈 쏟아붓고 분쇄 버튼을 누른다. 분쇄가 끝날 때까지 빈 컵과 뚜껑, 홀 밀크, 스킨밀크, 제로팻, 아몬드 밀크를 개수별로 채워 넣고 바닥을 쓸고 닦고 테이블을 내리고 동전 묶음을 캐셔 통에 뜯어 넣는다. 준비가 끝나면 그제야 깊은 호흡과 함께 그라인더에 잠시 기대어 앉는다. 몸이 데워진 따뜻한 그라인더의 규칙적인 진동과 깊은 원두향이 늘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매일 그렇게 앉아 동트는 맨해튼 거리를 바라봤다. 그 기억이 좋아서 회사에서 에스프레소 내릴 때마다 추출되는 줄기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는 희미한 기억의 냄새를 찾고는 했다.
커피를 좋아하다 보니 막연하게 카페를 한번 차려보고 싶다는 꿈이 늘 있었다. 나는 한번 결정하면 그냥 앞뒤 안 보고 막 밀고 나가는 성향이 좀 있다. ‘1974 way home’ 카페를 창업할 때도 그랬다. 남편과 내가 회사를 다니고 있었음에도 ‘지금이다!’ 싶을 때가 왔다. 뭐든지 신중하고 리스크를 최소화하려는 남편도 갑자기 불도저로 변해서 여기저기 불을 뿜어대는 나를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난 그때 카페를 창업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청년창업 지원센터에 등록해 교육을 수료하고 은행에서 창업자금 대출을 받았다. 그동안 저축한 돈을 긁어모아, 층고가 높아 쏙 마음에 들었던 대로변의 매물을 계약했다. 어설픈 스케치로 인테리어 디자인도 해보고 메뉴도 하나하나 직접 만들었다. 낮에는 치열하게 회사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 새벽까지 졸린 눈을 비벼가며 수개월 개업 준비를 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별로 힘들지도 않았다.
‘1974 way home’은 북카페로 만들고 싶었다. 높은 층고 가득 책장을 짜놓고 사다리를 두었는데, 막상 책을 다 사서 채워 넣으려니 자금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출판사와 북 커뮤니티에 메일을 보냈다.
‘자, 내가 이제 북카페를 만들 건데, 근데 이 북카페에 책이 없는데, 그래도 이 카페가 책으로 곧 유명해질 예정이라, 그러니까 그쪽 책 좀 보내달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 논리였다. 그런데도 정말 감사하게도 여기저기서 내 뜻에 공감해주는 얼굴도 모르는 많은 분이 박스째 책을 보내주시기 시작했다. 박스를 뜯을 때마다 느꼈다. 세상은 참 아름답구나.
오픈 후 자발적인 바이럴 포스팅들이 이어졌다. 국내뿐 아니라 일본 블로거들까지 카페를 찾아와 소개 포스팅을 할 정도로 입소문을 탔다. 《서울, 그 카페 좋더라》, 《카페 놀이》, 《it cafe》, 《오후 3시, 카페에서 만나다》 등의 카페 관련 책들과 「얼루어」, 「쎄시」, 「바&다이닝」, 「메종」, 「까사리빙」, 「월간디자인」, 「월간 페이퍼」 등등. 나중에는 다 기억도 안 날 만큼의 많은 매거진에서 카페를 소개해줬다.
김주혁, 최강희, 조여정 같은 연예인들의 인터뷰 장소로도 쓰이고, 가끔 사유리 같은 방송인들이 방문해주기도 했다. 뮤직비디오 장소로도 사용되고 윤계상, 정유미가 주연한 <조금만 더 가까이>라는 영화 촬영소로 대관이 되기도 했다. 북카페이다 보니 작가와의 만남이나 북 토크 같은 행사들도 진행했다. 남편은 심지어 카페의 대표로서 뉴스 방송 인터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당초 계획처럼 카페 매니저를 따로 고용하고 회사와 병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남편과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카페에 전념하기로 했다.
이쯤 되면 20대에 일찍 창업해서 돈 좀 벌었겠구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전~혀 전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3번 강조했다.) 입소문은 탔지만 북카페 특성상 마진과 회전율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월세가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마치 건물주를 위해 일하는 기분이었다. 월세를 제하고 나면 20대 젊은 두 사람이 오직 카페 수익에만 의존하기에는 매출의 한계점들이 분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2년 계약 만료 시점에 권리금을 받고 카페를 넘기기로 했다. 초기 투자한 돈도 그렇고 나름 상권을 만들어 놨으니 만루홈런을 쳐보자는 계획이었다. 감사하게도 우리 카페를 넘겨받고 싶어 하는 단골 언니가 있어서, 내 손을 떠나더라도 우리 카페는 잘 유지될 수가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이쯤 해서 나는 엄청난 인생 수업을 받게 된다.
건물주가 언니와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갑자기 버티는 것이다. 건물주는 당시 여당의 모 국회의원이었는데 (우리는 대변인 하고 만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자기는 여자랑 계약하기 싫다는 거다. 어이가 없었지만, 건물주가 슈퍼 갑이었다. 부랴부랴 권리금을 대폭 낮추더라도 빨리 다른 남자분을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헛고생이었다. 사실 건물주는 그냥 빈손으로 우리를 내보내고 직접 가게를 운영하려는 속셈이었다. 결국, 임대 계약 종료 시점에 허무하게 쫓겨나게 된 남편과 나는 무료 법률상담을 해주는 변호사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몸 고생 마음고생을 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해볼까도 싶었다. 카피는 “서민 살림 위협하는 비양심 국회의원 사퇴하라!” 정도일까… 아니면 직관적으로 “내 돈 내놔라!” 정도. 자극적인 퍼포먼스까지 곁들인 1인 시위 상상을 많이 해봤지만 실현하지는 못했다. 무의미했다. 우리 가게는 그때만 해도 딱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조건의 건물이었다. 이미 판은 내가 가게를 계약하던 시점 훨씬 전부터 건물주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었다. 뛰는 서민 위에 나는 건물주였다. 그래서 그렇게 2년 동안 운영했던 1974 way home, 커피를 향한 나의 진심이 담겼던, 첫사랑 같았던 공간은 문을 닫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천안에 같은 이름의 카페가 생겼다고 한다. 깜짝 놀랐다. 검색해서 그곳의 공간과 메뉴 디자인 등을 살펴보았다. 우리 카페에서 분명 조금의 영감은 받은 것 같다.
‘1974 way home’은 일본 몬도 그로쏘(Mondo Grosso)라는 뮤지션의 연주곡 제목이다. 카페 네이밍을 고민할 때 우연히 그 음악을 만났다. 이거다! 싶은 마음이었다. 내가 카페를 통해 전해주고 싶었던 감성이었다. 그래서 그 곡의 이름을 카페 이름으로 정했다. 남편과 나, 첫째 아들의 핸드폰 뒷자리는 1974이다. 둘째도 핸드폰을 갖게 될 때가 온다면 분명히 뒷자리는 1974일 것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우리의 이야기와 감성을 빼앗긴 기분이 들어 속 좁은 마음에 조금은 슬펐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다. 그래도 내가 사랑했던 그 이름이 여전히 커피 향 가득한 한 카페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 진심으로 감사하다. 그곳은 오래오래 편안히 운영되길 기도한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조용히 그곳을 방문해 1974 way home 노래를 들으면서 커피 한잔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