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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Dec 19. 2018

사랑 인생

시리즈 물을 기획하려던 것은 아닌데, 내일 병원 방문을 앞두고 오늘은 그 마지막 3번째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을 써볼까 한다. 그래서 오늘의 제목은 바로 ‘사랑 인생’이다.     


난 ‘사랑꾼’이다. 내 모든 프로필에는 언제나 ‘사랑꾼’이라는 단어가 내 정체성의 많은 부분을 대신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랑은 흔히 이야기하는 남녀 간의 로맨틱한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 이해관계를 막론하고 난 그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좀 과하게(!) 사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하루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회사 팀원들이 주요 타깃이 되고는 했다. 그냥 그들의 존재 자체, 행동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그들이 웃고 있으면 나도 웃게 되고, 표정이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마냥 걱정되었다. 늘 잘해주고 싶고 그들의 행복과 성장을 돕고 싶었다. 항상 같이 있는 순간이 좋았다. 맨날 보면서도 주말이 되면 또 보고 싶어질 정도로. 팀원들은 이제 늘 눈에서 하트를 쏴대는, 시도 때도 없이 “보고 싶다!” 말하는, 회의하다 말고 갑자기 “너무 예쁘다! 사진 찍자!”라고 말하는, 부담스러운 사랑꾼 국장이 이제는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다.

 




어린 시절 무서운 할머니 밑에서 혼자 살았다. 외로웠다. 그래서 할머니를 졸라 병아리를 한 마리 샀다. 할머니는 끔찍이도 병아리를 싫어하셨다. 부엌에 있는 종이박스 밖으로는 병아리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작고 보송보송한 그 병아리를 난 굉장히 아꼈다. 어느 날 할머니가 교회에 가셨다. 여느 때처럼 박스에 있는 병아리를 쓰다듬으며 놀고 있었는데, 병아리가 말했다. “엄마, 나 좀 잠깐 꺼내줘.” 내가 분명 안 된다고 했는데, 병아리가 계속 고집을 피웠다. “삐약삐약(잠깐인데 뭐 어때).”, “삐약삐약(할머니도 없으니까 괜찮아!).” 어쩔 수 없이 나는 병아리를 조심스럽게 박스에서 꺼내줬다. 목청껏 삐약거리며 부엌을 신나게 활개 치는 병아리를 보니 엄마로서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부엌 문턱에 걸터앉아 삐약이는 소리를 노래 삼아 잠시 앉아 있는데, 갑자기 삐약하는 소리가 음소거한 듯 탁! 멈췄다.


그 순간 난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병아리가 할머니가 아끼는 투명한 꿀단지 속으로 가라앉고 있던 것이다! 할머니는 왜 뚜껑을 열어두셨던 걸까. 병아리는 왜 하필 거기로 점프한 것일까. 온 세상이 순간 슬로우 모션처럼 움직였다. 꿀 속으로 침잠하는 병아리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비주얼도 충격이었지만 직감적으로 이 아이는 살 수 없다는 걸 안 것 같다. 병아리는 마치 호박 보석에 갇힌 쥐라기 시대 익룡처럼 곧 화석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일은 벌어져 있었다. 할머니가 오시기 전에 현장을 은폐해야 한다는 것을 난 본능적으로 알았다. 꺼이꺼이 울면서 단지 뚜껑을 찾아 관 뚜껑에 못 박듯이 꼬옥 닫아주었다. 그리고 앞마당에 나가 김칫독 옆에 그 꿀단지를, 아니 내가 사랑했던 그 병아리의 꿀 관을 묻었다.     


대학교 신입생 때였다. 혼자 자취를 하면서 토끼를 한 마리 키웠다. 편의점에 안고 가면 사람들이 나랑 똑 닮았다고 예쁘다고 칭찬했다. 내 배 아파 낳은 아이처럼 뿌듯해하곤 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손톱으로 장판을 벅벅 긁는 듯한 소리가 난다. ‘음… 이게 무슨 소리지?’ 하고 잠에서 깼는데 이내 소리가 멈췄다.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날, 난 충격적인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내가 아꼈던 그 토끼가 팔다리를 만세 하듯 위아래로 쭈욱 뻗은 채 11자 모양으로 눈을 뜨고 죽어 있었다. 건강했던 우리 아이가 왜 갑자기 이런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안기도 힘들어진 토끼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화단에 길쭉하게 땅을 팠다. 주인아저씨한테 걸리면 혼날까 봐 눈짐작으로 길이를 가늠해서 파려니 헷갈렸다. 몇 번 사이즈를 재고 나와 다시 팠다. 몰래 숨죽여 울면서 토끼를 묻어주었다. 몇 개월 뒤, 자취방 짐을 옮기다가 TV를 연결하는 굵은 케이블이 다 벗겨져 구리선이 노출된 것을 봤다. 미스테리했던 죽음의 이유가 밝혀졌다! 토끼는 그날 밤 전선을 갉아 먹다가 감전이 된 것이었다.


병아리는 질식사, 토끼는 감전사라니! 은연중에 난 생각했다. 이렇게 작은 동물 하나도 못 지키는데, 난 아이는 정말로 못 키울 거라고. 이제와 고백하지만 난 정말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울 자신이 없었다. 내가 엄마 아빠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서 그랬는지, 아이가 부모의 사랑 속에서 자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경험적으로 알지를 못했다. 그냥 막연하게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이 있는 친구는 생일파티를 하는 친구다!’ 정도로 정의했던 것 같다.     


남편과 연애 시절,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난 결혼해도 아이를 낳아 사랑하며 키울 자신이 없어.” 실제로도 정말 그랬다.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내 세상이 바뀌었다. 아니, 정확히는 나라는 사람이 바뀌었다. 내 안에 이렇게나 많은 사랑이 있는지 나도 몰랐다. ctrl+C(복사), ctrl+V(붙여넣기) 같은, 날 닮은 큰 두 눈을 보는 순간 기분이 정말 묘했다. 물론 초보 엄마의 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지만, 나에게 엄마라는 이름을 주고 내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의지하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기했다. 부드럽고 통통한 볼과 따뜻하고 촉촉한 몸을 가지고 나를 통해 세상에 온, 이 순수한 영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난 지태 그리고 현태와 사랑에 빠졌다. 상처받을 걱정 하지 않고 무조건 사랑을 쏟아부어도 괜찮은 존재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큰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아이를 낳으면서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사랑꾼 기질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 같다.

 

나는 매일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진지하게 고백한다. 하루에도 여러 번,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날은 내가 기억하기로 단 하루도 없다.     


앞으로 아이들은 더 오랜 시간 나와 함께 하겠지만, 지금 이 어린 시절의 모습은 이제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만날 수가 없다. 매일 밤 곁에서 잠드는 아이들이지만 다음날 눈을 뜨면 또 조금은 성장해 달라져 있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함께했던 9살의 지태와 6살의 현태도 이제 만날 수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면 매일 하는 포옹도 눈 맞춤도 의미가 달라진다. 지금 이 모습의 지태와 현태와는 곧 이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익숙함이 아닌 애틋한 진심이 담기게 된다. 그렇게 나는 내 소중한 인생 보석인 지태 현태와 하루만큼의 진지한 사랑 이야기를 매일 써나가고 있다.


사람은 죽기 전에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걸, 더 자주 사랑한다고 말할걸…’ 하는 후회를 가장 많이 한다고 한다. ‘아 그때 그 PT를 땄어야 했는데… 차를 바꿨어야 했는데… 애들한테 더 엄격하게 해야 했는데…’ 하는 후회를 하는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특히나 암이라는 중병에 걸리고 나서 삶을 되돌아보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당장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내가 1월 4일 수술 뒤에 못 깨어나는 상황이 오더라도, 혹은 암이 전이되고 재발되어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해 죽음을 맞이하는 날이 오더라도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최소한 지태 현태에게 사랑을 더 주지 못한 거로 후회하고 싶지 않다. 완벽한 조건의 사랑이 아닌,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의 진심이 담긴 사랑을 하고 싶다.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하고 포용하고 존중하고 매일 사랑한다고 속삭여주고 눈 맞추고 안아주면서, 그렇게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은 늘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지내고 싶다.     


사랑꾼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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