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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Dec 25. 2018

크리스마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다. 일찍 집을 나섰다. 거리를 달려 떨리는 그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주차할 자리가 없다. 오늘도 예약이 풀이구나. 수많은 사람이 온갖 기대를 품고 모이는 이곳. 그렇다 오늘도 난 병원에 왔다.

오늘은 암전이 여부를 확실히 알기 위한 우측 림프 생침 검사를 받으러 왔다. 5분이 아쉬울 크리스마스이브에 복도에서 두 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병원은 세상과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내 차례가 왔다.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환자복을 벗고 만세를 하라고 했다. ‘이제 시작이구나.’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들이마셨다. 기다린다. 뭔가 조용하다. 어라, 아무도 없다. 선생님께서 검사 도구를 가지러 자리를 비운 듯했다. 조용한 진료실. 38세 심지혜 씨는 상의를 다 벗고 만세를 한 채로 적나라한 형광등 빛 아래 신생아처럼 눈만 깜빡이며 누워 있었다.


도구를 가져다 두거나, 도구를 가져온 뒤 벗으라고 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뭐라도 살짝 덮어주고 갈 수는 없었나. 환자의 인권을 여기서 논하자는 건 아니지만, 유방암 환자들은 진료 때마다 크고 작은 굴욕을 매번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이럴 땐 다른 암이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초보 환자라서 그런 걸까. 나중엔 시원하게 훌렁훌렁 익숙해지는 것인가….     


넷플릭스 <오렌지 이즈 더 블랙>이라는 미드에서 주인공 파이퍼가 교도소에 입소할 때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교도관은 그녀에게 다 벗은 상태에서 쪼그리고 앉아 항문이 노출될 만큼 기침을 하라고 지시한다. 항문 속에 금지된 약물을 숨겨왔는지 조사하기 위함이다. 굴욕감을 느낀 그녀가 지시에 반항하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이제는 사회에서 인정받던 지성인이 아니다. 죄수일 뿐이다. 파이퍼는 마약 밀수라도 했지, 나는 뭘 했나 싶다. 상의 노출 만세 포즈로 검진 선생님을 기다리며 ‘거참 섹시한 크리스마스네…’라는 생각을 했다.     


유전자 검사실을 거쳤다. 마흔 이전에 암에 걸린 사람들은 국가지원으로 BRACA1, BRACA2 유전자 돌연변이 검사를 받게 된다. 여기서 이상이 나오면 암 발병은 유전자 변이 때문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나도 검사를 받았다. 난 변이가 없었다. 즉 유전자의 영향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결과에 안도하긴 했지만 약간의 아쉬움도 있었다. 변이가 있었다고 하면 최소한 내가 왜 암에 걸렸는지에 대한 답은 얻었을 텐데…. 암은 수술과 치료도 힘들지만 이후 재발을 막는 것이 중요하고 또 어려워서, 발병 원인을 정확히 모르는 나는 여전히 막막한 두려움이 있었다.     


문득 앤젤리나 졸리가 생각났다. 앤젤리나 졸리는 암이 발병한 것은 아니었지만 BRACA 유전자 변이로 진단되어 예방적 차원에서 양측 가슴을 다 도려내는 전절제 수술을 감행했다. 그녀의 엄마가 난소암, 이모가 유방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유전자 변이는 가족력이기 때문에 그녀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아이들이 엄마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지 않게 하려고 수술을 했다고 한다. 참 대단한 배우이자 위대한 엄마이구나 싶다.


앤젤리나 졸리 가슴을 검색해보았다. 스크롤을 한참 내려가며 가슴 사진을 찾았다. 확대도 해보았다. 뚫어져라 살펴봤다. 잘 나온 동영상은 없나…. 38세 심지혜 씨는 할리우드 스타 가슴에 정신이 한참 팔려있다. 문득 나는 또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다. 거참 섹시한 크리스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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