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4일, 스니커즈 ‘BIG DAY OUT’이라는 캠페인을 했다. 타이거 JK의 힙합 콘서트를 중심으로 ‘하루 종일 멈추지 말고 놀자!’라는 콘셉트로 전개한 캠페인이었다. 그 캠페인의 키 카피가 ‘그날이 온다’였다. 나에게도 그날이 온다. 암 진단 이후로 매일 손꼽아 기다린 그 날, 바로 1월 4일 수술 날이다.
수술을 기다린 지난 5주, 심지혜 씨 인생 통틀어 이렇게 마냥 그냥 ‘존재’하며 지내본 적이 있었던가! 그나마 한 활동이라고는 살 좀 찌워두기, 보고 싶은 사람들 만나기, 극장 자주 가기, 집 안 구석구석 정리해두기 정도다. 아! 머리 염색해두기도 있었다. 나는 항상 브라운 계열의 머리 색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수술 후 당분간은 미용실에 뿌리 염색하러 자주 가기 힘들 테니 미리 어둡게 해두고 싶었다.
단골 미용실, 담당 실장님께 검은색으로 염색을 해달라고 요청했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절레절레) 안 어울려, 지금 머리 예쁜데 왜, 하지 마.”
“아… 그냥요. 그냥 어둡게 하고 싶어서요.”
내 주문이 약간 의외였나 보다. 솔직히 나도 내 스타일만 생각하면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파서라고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실장님은 예전에 갑자기 내가 단발로 확 잘라달라고 떼썼을 때 잘 말렸던 것처럼, 지금도 말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니야, 하지 마. 펌은 어때? 클리닉을 할까 그럼?”
“아…….”
“왜 하려는 거야?
“…….”
“얼굴 톤이 지금 컬러가….”
“아! 그냥 해주세요!”
이런, 망했다. 나도 모르게 말이 조금 세게 나갔다.
잠깐의 정적. 급한 마음에 두뇌 풀가동하여 뒷수습을 시도했다.
“아! 제가 사실 전부터 검은 머리를 꼭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토종 100% 한국인이 이건 또 무슨 헛소린가…. 창의력 부족이었다.
부끄러웠다. 실장님은 을의 미소를 장착하고는 알겠다고 답했다. 약간 서운해하는 듯했다.
아이고……. 어렵다. 뭐든 정직하지 않으면 힘든 법이다. 훌쩍.
입원 전날. 아침부터 암 환자 커뮤니티에 들어가 수술 후기를 꼼꼼히 읽었다.
‘수술 후 3일은 그냥 지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가슴 위에 돌덩이를 지고 사는 느낌이에요.’
‘2주 넘게 몸에 주렁주렁 달린 배액관 때문에 힘들어요.’
‘수술 부위 보면 그냥 멘탈 나갑니다. 우울증 싫으시면 거울 보지 마세요.’
‘막상 수술실에서 보니 암이 더 퍼져 있어서 계획에 없던 대수술을 했다. 수술 시 떼어낸 암 조직을 가지고 최종 검사를 해보니 2기인 줄 알았는데 3기였다. 순한 암인 줄 알고 나름 안도했는데, 수술 후 보니 정반대였다’라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쉽게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다. 처음 조직검사 때 ‘에이, 마흔 미만 조직검사에서 암 나올 확률은 2% 미만이래. 당연히 나는 아니겠지!’라며 자신 있게 혼자 병원에 갔었다. 나는 당연히 98%에 속할 것이라 믿었다. 내 착각이었다. 내 세상에 당연한 건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때의 경험이 내겐 작은 트라우마가 된 것 같다. 언제든 또 그럴 수 있다는 두려움이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다.
게다가 내일 듣기로 한 림프 검사 결과가 혹시라도 안 좋으면 수술도 못 하고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데, 와, 그건 진짜 생각하기도 싫었다. 목구멍이 꽉 조여 오는 것처럼 마음이 답답했다. 난… 어떻게 될까? 전이된 거면 어쩌지? 수술은 할 수 있겠지? 머리 빠지는 건 죽기만큼 싫은데…… 항암만큼은 피하고 싶다. 난 암이 생긴 원인도 모르잖아…… 치료 후에도 비슷하게 살아갈 것 같은데. 재발하는 건 아닐까? 그럼 이런 수술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인간의 뇌는 생존의 문제 앞에서는 어쩌면 이렇게도 부정적인가! 온갖 안 좋은 생각에 압도될 것만 같았다. 이러다 안 되겠다 싶었다. 그냥 벌떡 일어났다. 뭐든 움직이자.
커튼 활짝 열고 환기를 한다. 찬 기운 속에 햇살을 가득 받으며 한바탕 구석구석 집안 정리를 했다. 지태랑 달리기 시합도 했다. 열두 살 될 때까지만 봐줘야지. 뭔가 좀 기운이 나는 듯했다.
넣어놨던 입원 준비물 가방도 드디어 밖으로 꺼냈다. 세면도구, 빨대 컵, 수면 양말, 카디건, 편한 신발, 물 티슈…. 생존(?)을 위한 기본 도구는 어느 정도 틈틈이 챙겨둔 상태였다.
스페셜 패키지로 가방을 업그레이드해본다. 소중한 책들, 선물 받은 만년필과 노트, 가죽 다이어리, 블루투스 이어폰, 부드러운 스카프, 힐링 패치….
어라?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이거 왠지 여행 짐 싸는 기분이 들었다. 슬쩍 기분이 좋아진다. 인간은(나는) 참으로 단순했다.
내친김에 바이브(VIBE)로 ‘힙 터질 때 듣는 노래’ 디제잉도 틀었다. 리듬을 타다 보니 심지어 즐거워진다. ‘그래, 암 병동에서 제일 예쁜 환자가 되어보자!’ 쿠션 팩트랑 립스틱, 미스트도 일단 챙겼다. 기분이다 싶어 마스크 팩까지 넣었다. 누가 보면 이 암 환자 개념 없다고 하려나.
뭐, 괜찮다. 몸 아픈 것도 속상한데 마음까지 아프면 진짜로 무너질 것 같았다. 일단 내 기분 좋아지는 게 급선무였다. 개념 없다 해도 좋으니 최대한 ‘해맑은 암 환자’ 콘셉트로 지내야겠다.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에 여행 간다 생각해야지! 내 인생 내공 총동원해서, 병원에서의 하루하루를 최대한 유쾌하게 보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