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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Jan 09. 2019

체크인

1월 3일


입원 날 아침.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미워!”

현태가 발을 쿵쿵 구르며 제방으로 들어가 숨었다. 화가 났다는 뜻이다. 현태에게 한약을 먹이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긴 회유와 설득에도 당최 먹지를 않자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한 번이라도 더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엄마 걱정하지 말라고 잘 다녀오겠다고 말해줄 시간인데…… 초조한 마음에 그냥 먹으라고 독촉을 했더니 현태는 그게 또 서운했나 보다.

방 쪽으로 크게 외쳤다.


“빨리 먹어~ 엄마 가야 한단 말이야~! 엄마랑 뽀뽀 안 할 거야?”

“….”

“아 몰라! 먹지 마! 그럼. 엄마 그냥 지금 병원 갈 거야!”

“엄마 미워! 마음대로 해!”


싱크대에 남은 한약을 버렸다. 울고 싶었다. 다른 한약 봉지들도 다 칼로 푹푹 찌르고 싶다. 화가 났다. 이게 아닌데…… 오늘은 이러면 안 되는데…….     


이성이 나를 타이른다. 진짜 그냥 가버리면 분명히 나도 현태도 많이 속상할 거라고. 진정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현태가 울면서 무릎을 안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가만히 현태를 안아주었다. 엄마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지 평소보다 쉽게 다시 꼭 안긴다. 현태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했던 건 정말 한약이 싫어서가 아니라 이걸 마시면 엄마가 떠난다는 거, 그게 싫었던 건 아닐까? 예정했던 작별인사를 길게 나누고 입원 준비물을 챙겨 집을 나섰다.     


아침부터 삐걱거렸구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늘은 암전이 여부 추가 검사 결과를 듣는 날인데…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야. 해맑은 암 환자가 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좋아하는 걸 하자. 크록스 매장에 가서 수면 양말을 신고도 발이 쏙 들어갈 편한 슬리퍼를 샀다. 커피, 스마일, 무지개, 하트. 내가 좋아하는 장식들도 붙였다. 비싼 호텔 뷔페에도 갔다. 격하게 최후의 만찬을 즐겼다. 철저한 타깃 분석에 근거한 기획과 자본이 만나 어떻게든 내 기분을 띄워보려고 애썼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결국 눈물이 터졌다. 두렵다. 두렵다. 두렵다. 두렵다.    


병원에 도착했다. 한바탕 울고 나니 기분이 나아졌다. 상담실에서 추가 검사 결과를 기다린다. 죽음 앞에서도 초연한 사무라이가 된 기분이다. 교수님이 들어왔다.

“오른쪽 림프 추가 검사를 했군요.”

인상을 쓰고 결과 파일을 훑어보았다. 몇 번의 클릭 소리에 딸깍하고 심정지가 올 것 같았다.

“네, 이상 없네요!”

세상에나!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제일 두려웠던 산을 넘었다. 예정대로 그럼 수술 진행이다! 오른쪽 림프 전이가 나왔다면 원격전이, 즉 4기라고 판단을 하게 되는데, 다행히도 내 오른쪽 림프는 괜찮다고 했다. 남편 손을 꼭 잡고 기분 좋게 방을 나왔다.

마침 암 병동 병실 배정이 완료되었다는 안내 문자가 왔다. 진짜 어디 여행 와서 호텔 체크인 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세상이 유쾌하게 모습을 바꾼다. 병원은 순식간에 활기가 넘치는 흥미로운 곳이 되었다.     


입원을 마치고 남편은 지태 현태를 돌보러 집으로 가고, 난 혼자 병실에 남았다. 외과 성형외과 마취과에서 각자 다음날 있을 수술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혈전 방지를 위한 압박스타킹을 신고, 전신마취를 위한 주삿바늘을 발목에 꽂았다. 아침에 있을 방사능 동위원소 주사 설명을 듣는 중에 남편에게 연락이 왔다. 지태와 현태가 응원 편지를 썼다고.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응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수술을 앞둔 조용한 밤, 혼자였지만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남편이 사다주고 간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일기장을 열었다. 퇴사 이후로 처음이다. 일기장은 11월 28일에 멈춰 있었다. 다음 주 예정된 PT, 이직을 컨펌받은 후 죄송했던 마음,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들이 복잡하게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     


처음 암 진단을 받은 후 내 삶은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기장을 열기가 싫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실상은 정반대였던 것 같다. 지난 5주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고민과 노력과 사랑으로 가득했던, 제일 나다운 시간이었다. 일기장에 암 환자의 삶을 적어 내려가는 것이 그렇게도 두려웠는데, 지금은 그 시간을 기록하는 내 모습이 참 편안하게 느껴진다. 이제야 내 원래의 삶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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