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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Dec 12. 2018

출근하고 싶다

출근하고 싶다. 이것은 내가 암에 걸려서 말하는 헛소리가 아니다. 일에 몰입하는 즐거움과 마음 편한 월급쟁이의 삶도 그립지만, 지금 제일 그리운 건…… 그렇다! 출근 그리고 아침의 일과다.     


난 약간 강박적이다 싶을 만큼 지각하는 걸 싫어한다. 야근하고 회식을 하고 아무리 늦게 집에 들어가도 대부분 아침에는 벌떡 일어났다. 물론 출근 시간을 지키고 싶어서다. 부정하고 싶지만 난 아주 약~간 FM 기질이 있다.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국장이 칼출근이라니……. 야근한 다음 날은 직원들에게 늦게 출근하라 말해두고 “나 내일 늦게 올 거야!”라는 거짓말까지 해보았지만, 팀원들은 지박령처럼 아침마다 제자리를 지키는 독한 국장 때문에 나름의 마음고생은 한 것 같다. 특히 늦게까지 이어졌던 회사 송년회 다음 날, 전사에서 유일하게 우리 국만 정시에 전원 출근해 있던 일은 유명하다. (난 분명 다들 다음날 늦게 나오라고 했다!)     


내가 일찍 출근하는 제일 큰 이유는 혼자 여유롭게 누릴 수 있는 아침 시간 때문이다. 보통 아이들 등교 준비와 함께 아침을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8시 반쯤에는 회사에 도착하고는 했는데, 그 후로 공식 출근 시간인 10시 전까지는 아이들도 일도 없는 나만의 온전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하이힐에서 편안한 실내화로 갈아 신으며 노트북 일기장을 바로 켠다. 자판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고 조용히 두 눈을 감는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한다. 곧 신의 계시를 받아 나는 막힘 없이 글을 써 내려간다……는 아니고 바쁘다는 핑계로 하루 동안 되돌아보지 못했던 내 마음을 그냥 일기장에 툭 하고 꺼내놓는다. 눈을 감고 신 내린 듯 자판을 두드리는 내 모습에 사무실 청소하는 이모님께서 괜찮으냐며 등을 두드려준 적도 있다. (부끄러웠다.)


사실 늘 별 내용은 없다. 그냥 지금 기분은 어떤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바라는 게 뭔지, 뭐가 제일 힘든지… 그렇게 써 내려가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누굴 원망했던 마음도 쉽게 풀어지고는 했다. (팀원들은 내 일기장을 데스노트라고 불렀다. 그래, 다 적혀 있다!) 그렇게 일기를 쓴 뒤에는 한참을 부스럭거린다. 앞머리 고데기도 하고 벗겨진 네일도 바르고, 테트리스 같은 서랍 속을 정리하며 쓰레기도 버린다. 읽던 책도 펼치고 마음 가는 대로 필사도 하다 보면 나 스스로와 주변이 정돈되면서 뭔가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평화롭게 일기를 쓰며 시작하는 출근 후 아침이 나는 한결같이 좋았다.     




음, 지금은 잘 모르겠다. 퇴사 후에는 단 한 번도 일기장을 켜지 않았다. 지금 기분은 어떤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바라는 게 뭔지, 뭐가 제일 힘든지…. 사실 답은 다 알고 있다. 다만 이제는 자신이 없다. 그 일기장에 적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어쩌면 나는 지금의 하루하루를 부정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일상을 기록하는 일기장에 ‘나는 암 환자가 되었고 일을 그만두었다.’라는 말을 적는 순간, 모든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버릴까 무섭다. 다들 요즘 암은 별일 아니라고, 죽지는 않는다고, 온갖 눈부신 의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내 인생도 ‘노 프라블럼’이라고 격려해주지만 사실 나는 무섭다.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수술과 치료 후에도 내 삶이 이제 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을 거라는 그 불가항력이 무섭다.     


나름 수월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와 역시 난 이런 상황에서조차 긍정적이구나!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러고 있는 걸 보니 또 그 속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괜히 그냥 우울한 척하고 싶어 하는 건지 아니면 이제야말로 진짜인지… 아 나도 모르겠다. 그냥 어디든 출근하고 싶다. 생기로 가득 찼던 내 원래의 아침이 마냥 몹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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