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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Dec 14. 2018

수술 전 검사

12월 13일


수술 전 전이검사 날이다. 아침부터 사뿐사뿐 하얀 눈이 내렸다.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서 평소처럼 샤워하고 머리 말리고 옷을 고르고 나갈 준비를 하다 보니 뜻밖의 생기가 돌았다. 응원하고 격려해주는 지인들의 문자와 전화가 이어졌다. 마치 대형 프로젝트 비딩 PT라도 하러 가는 날 같다.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니웨이 아침부터 기분은 좋았다.     


평화롭게 예쁜 눈길을 달려 병원에 도착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병원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었다. 서민 피 빨아먹는 악질 병원, 사람 수술해서 죽이는 병원이라는 현수막과 함께 리코딩된 곡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현수막 위에 흐르는 핏자국 같은 레드 궁서 폰트를 참 잘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흰색 의사 가운 같은 백그라운드 컬러와 어우러지면서 기획의도를 무척 잘 살렸다. 담을 메시지가 많았던 다른 현수막은 폰트 사이즈를 강약 조절하여 균형감 있게 배치했다. 블랙과 옐로우는 내가 즐겨 쓰던 기획서 컬러 구성이네. 아! 곡소리를 라이브로 했으면 더 진정성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무슨 당치도 않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나서야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당장 이곳 의료진에게 맨몸을 드러내고 살을 찢어야 하는 환자들에게 자칫 지나친 불안감을 주는 건 아닐까? 분명 슬픈 사연이 있겠지만 조금은 집단이기주의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애써 모른 척하고 암 병동으로 차를 돌렸다. 암 병동을 안내하는 모든 표지판에는 어김없이 장례식장도 함께 표기되어 있다. 이 건물 배치는 현실적인 요소를 고려해서 나온 거겠지. 아무래도 대한민국 사망률 1위는 암이니까 최적으로 동선을 배치한다면… 아, 나 뇌 구조 왜 이러니. 자꾸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술과 치료에 필요한 상세한 진단 검사를 하게 된다. 이게 시험이라면 내가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텐데, 오늘의 검사는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냥 매겨지는 것이라 하니 그저 무기력한 마음이었다. X-선 검사, 채혈 의학검사, 방사선 골밀도 검사, CT 컴퓨터 단층촬영, MRI 검사, 핵의학 전신 뼈 검사, 심장 초음파 검사, 심전도 검사, 폐 기능 검사가 오늘 예정된 검사 항목들이다. 오늘 검사에서 만약 림프를 통해 다른 장기나 뼈까지 암세포가 퍼졌다는 걸 알게 되면 암 기수가 높아지고 수술, 항암, 방사, 호르몬제를 동반한 모든 과정의 치료가 상당히 더 힘들어진다. 따라서 오늘 검진의 최고 목표는 우선 림프가 깨끗하다는 진단을 받는 것에 있다. 하지만 시작부터 매끄럽지는 않았다.     


가슴 초음파를 하던 중이었다. 림프를 보던 중에 검진 선생님께서 갑자기 장갑을 벗더니 지금 생침 검사를 하자고 한다. 조직검사와는 다른 거지만 굵고 긴 바늘을 겨드랑이에 찔러서 조직을 떼어내는 거라고 건조하게 말한다. (동공 지진) 이걸 근데 초음파 중에 갑자기 왜 하냐고 물어보니 “필요하니까 하지 왜 하겠냐”라고 차갑게 답한다.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왜 때리냐고 물으면 “필요하니까 때리지 왜 때리겠냐”라고 답해주고 싶었다. 몇 번 소독하더니 마취도 안 하고 그냥 겨드랑이를 쑥 찌른다. 아팠다. 그리고 뭔가 불안하다. 림프도 전이가 된 걸까? 그럼 안 되는데…. 아침부터 좋았던 기분이 결국 와르르 무너졌다.   

  

채혈실에서는 메디컬 코미디를 찍었다. 나는 마흔 전에 암에 걸렸기 때문에 일반적인 검사 목적 외 다른 이유로도 피를 더 많이 뽑는다. 생활방식이 아닌 유전자 문제인지를 확인하기 위함도 있고 나같이 젊은 환자들의 경우를 상세히 연구하기 위함도 있다. “바늘이 좀 굵어요~” 하더니 에누리 없이 쑥 밀어 넣는다. 진짜 이렇게 많이 뽑아도 괜찮나 싶을 만큼 뽑기에 ‘팔에 구멍 난 거 아닌가 하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채혈실을 나오자마자 팔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팔뚝을 타고 몇 줄기가 흘러 바닥에 곧장 두둑 떨어질 만큼 피가 났다. 당황한 남편이 당황한 간호사에게 솜을 얻어와 당황한 나의 피를 닦아주는데… 이게 정상인가. 환자복에도 피가 묻는다. 옷 갈아입고 싶다. 다른 환자들 다 멀쩡한데 나만 문제 있다고 피로 낙인찍힌 기분이었다.     


전신 MRI 때는 힘들었다. 온몸에 암세포가 퍼진 곳을 확인하기 위해 핏속에 조영제를 주입하고 찍는데, 주사하는 순간 온몸이 뜨거워졌다. 몸의 모든 살갗이 동시에 극도로 예민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지럽고 토하고 싶은데 정확한 촬영을 위해 그 좁고 시끄러운 기계 속에 엎드려 누운 채 꼼짝도 하지 말고 숨도 크게 쉬지 말란다. 울렁거림을 버티기 위해 조금이라도 숨을 들이쉬면 사진이 흔들린다고 숨 좀 살살 쉬라고 교도소 안내 방송처럼 스피커가 말한다. 그 상태로 30분을 버티는데 너무 힘들었다. 몇 번이고 손끝에 쥐여준 비상 버튼 벨을 누를까 싶었다. 그 고통의 시간 동안 이런 생각을 했다. 나중 되면 이것보다 더 힘들 때가 오겠지. 30분이 아니라 몇 날 며칠이 그렇겠지. 내 긍정적인 삶의 자세와는 무관하게 물리적으로 진짜 어쩔 수 없이 이 악물고 버텨야만 하는 때가 오겠지. 그럼 그저 지금처럼 이렇게 버텨보자. 그전까지는 충분히 더 즐겁게 지내자. 당장 어디 아픈 것도 아닌데 자꾸 우울해하지 말자. 하루하루 이 소중한 시간을 걱정하느라 낭비하지 말자. 이 기계에서 나가기만 하면 매일 휴가 받은 것처럼 지내야겠다고 다짐하며 시간을 버텼다. 그렇게 검사를 마치고 기계에서 내려오는데 여전히 속은 울렁거렸지만 그래도 뭐랄까 기분은 상쾌했다. ‘아… 이래서 고승들이 산속에서 고행하며 깨달음을 얻는 건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또 들었다.    


모든 검사를 마치고 어둑어둑해져 병원을 나서는데 그 곡소리가 또 들린다. 아침에 느낀 두려움보다는 조금은 더 열린 마음으로 곡소리를 듣게 된다. 검사 결과는 12월 20일에 나온다.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MRI 기계에서 득도한 것처럼 걱정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더 충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지내야겠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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