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고 싶다. 이것은 내가 암에 걸려서 말하는 헛소리가 아니다. 일에 몰입하는 즐거움과 마음 편한 월급쟁이의 삶도 그립지만, 지금 제일 그리운 건…… 그렇다! 출근 그리고 아침의 일과다.
난 약간 강박적이다 싶을 만큼 지각하는 걸 싫어한다. 야근하고 회식을 하고 아무리 늦게 집에 들어가도 대부분 아침에는 벌떡 일어났다. 물론 출근 시간을 지키고 싶어서다. 부정하고 싶지만 난 아주 약~간 FM 기질이 있다.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국장이 칼출근이라니……. 야근한 다음 날은 직원들에게 늦게 출근하라 말해두고 “나 내일 늦게 올 거야!”라는 거짓말까지 해보았지만, 팀원들은 지박령처럼 아침마다 제자리를 지키는 독한 국장 때문에 나름의 마음고생은 한 것 같다. 특히 늦게까지 이어졌던 회사 송년회 다음 날, 전사에서 유일하게 우리 국만 정시에 전원 출근해 있던 일은 유명하다. (난 분명 다들 다음날 늦게 나오라고 했다!)
내가 일찍 출근하는 제일 큰 이유는 혼자 여유롭게 누릴 수 있는 아침 시간 때문이다. 보통 아이들 등교 준비와 함께 아침을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8시 반쯤에는 회사에 도착하고는 했는데, 그 후로 공식 출근 시간인 10시 전까지는 아이들도 일도 없는 나만의 온전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하이힐에서 편안한 실내화로 갈아 신으며 노트북 일기장을 바로 켠다. 자판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고 조용히 두 눈을 감는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한다. 곧 신의 계시를 받아 나는 막힘 없이 글을 써 내려간다……는 아니고 바쁘다는 핑계로 하루 동안 되돌아보지 못했던 내 마음을 그냥 일기장에 툭 하고 꺼내놓는다. 눈을 감고 신 내린 듯 자판을 두드리는 내 모습에 사무실 청소하는 이모님께서 괜찮으냐며 등을 두드려준 적도 있다. (부끄러웠다.)
사실 늘 별 내용은 없다. 그냥 지금 기분은 어떤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바라는 게 뭔지, 뭐가 제일 힘든지… 그렇게 써 내려가다 보면 마음이 편해지고 누굴 원망했던 마음도 쉽게 풀어지고는 했다. (팀원들은 내 일기장을 데스노트라고 불렀다. 그래, 다 적혀 있다!) 그렇게 일기를 쓴 뒤에는 한참을 부스럭거린다. 앞머리 고데기도 하고 벗겨진 네일도 바르고, 테트리스 같은 서랍 속을 정리하며 쓰레기도 버린다. 읽던 책도 펼치고 마음 가는 대로 필사도 하다 보면 나 스스로와 주변이 정돈되면서 뭔가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평화롭게 일기를 쓰며 시작하는 출근 후 아침이 나는 한결같이 좋았다.
음, 지금은 잘 모르겠다. 퇴사 후에는 단 한 번도 일기장을 켜지 않았다. 지금 기분은 어떤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바라는 게 뭔지, 뭐가 제일 힘든지…. 사실 답은 다 알고 있다. 다만 이제는 자신이 없다. 그 일기장에 적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어쩌면 나는 지금의 하루하루를 부정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일상을 기록하는 일기장에 ‘나는 암 환자가 되었고 일을 그만두었다.’라는 말을 적는 순간, 모든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버릴까 무섭다. 다들 요즘 암은 별일 아니라고, 죽지는 않는다고, 온갖 눈부신 의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내 인생도 ‘노 프라블럼’이라고 격려해주지만 사실 나는 무섭다.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수술과 치료 후에도 내 삶이 이제 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을 거라는 그 불가항력이 무섭다.
나름 수월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와 역시 난 이런 상황에서조차 긍정적이구나!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러고 있는 걸 보니 또 그 속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괜히 그냥 우울한 척하고 싶어 하는 건지 아니면 이제야말로 진짜인지… 아 나도 모르겠다. 그냥 어디든 출근하고 싶다. 생기로 가득 찼던 내 원래의 아침이 마냥 몹시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