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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Dec 11. 2018

워킹맘 11년 차

나는 두 아이의 엄마다. 첫째는 열한 살, 이름은 김지태. 둘째는 여덟 살, 김현태다. 학교에 다녀왔는데 엄마가 늘 집에 있으니 둘 다 뭔가가 달라졌다고 느끼는 듯하다. 현태는 은연중에 계속 내가 해고당했다고 생각하는지 종종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고 내 손을 꼭 잡아준다. (아니라니까.) 지태는 별 신경을 안 쓰는 듯한데 전에 노트북에 암 환자 커뮤니티를 띄워놓은 채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 자리에서 스크롤 하며 글을 읽는 걸 보고 내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 또래 아이들에게 ‘암’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때가 되면 차분히 설명은 해줘야겠다는 생각은 한다.    




스물여덟 봄에 결혼해서 스물아홉 겨울에 첫째를 낳았다. 나에게 출산은 ‘와 인간은 이 정도로 아파도 죽지 않는구나…’ 하는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한 사건이었다. 그래도 다 낳았으니 이제 고통 끝, 행복 시작을 기대했던 나에게 이게 웬걸, 존재조차 몰랐던 훗배앓이에 진통만큼 힘들어했고 수유하는 내내 젖몸살로 수개월을 앓았다. 당시 내 주위엔 육아는커녕 결혼도 안 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총 쏘는 법도 못 배우고 전쟁터 한복판에 떨어진 이병처럼 실전 육아의 모든 것이 다 막막하고 어려웠다.


그때는 육아 병행을 위해 대홍기획이라는 광고대행사의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캠페인 론칭 날에 부킹해 둔 고정형 광고 바잉에 문제가 생겨 광고주와 중요한 통화를 진지하게 해야 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분위기상 전화 밖으로 애 웃음 소리가 들리면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100일 정도였던 지태는 해맑은 얼굴로 소파에서 놀고 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지태 양쪽에 큰 쿠션을 끼워 앉은 자세를 만든 뒤 조심스럽게 전화기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 틈새로 눈은 지태에게 고정한 채 광고주 전화를 받았다. 극도로 화가 난 광고주에게 애써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데 지태가 갑자기 칭얼대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혹시라도 소리가 들릴까 봐 방에 있던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은 지태를 계속 지켜보며 통화를 이어갔다. 곧 땀이 등 뒤로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화가 난 광고주와의 통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바둥거리던 지태가 쿠션을 밀어내고 옆으로 기우뚱 쓰러졌다. 지태 혼자 힘으로 일어나 앉을 수 있는 개월 수가 아니어서 잘못하면 쿠션에 얼굴을 박을 것 같았다. 당장 거실로 나가 지태를 일으켜주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이불 속에서 전화기만 붙들고 있는 무기력한 엄마였다. 지태가 한 번 더 기우뚱했다. 아예 소파 밖으로 떨어질 것 같은 상황이 되자 “죄송합니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하고 화가 날 대로 나 있는 광고주의 전화를 무작정 끊어버렸다. 그리고 거실로 나가 지태를 일으켜 안고는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하면서 엉엉 울었다.     


또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다. BBDO KOREA라는 광고대행사에 재직할 때였다. 당시 애뉴얼 PT 준비로 야근을 정말 삼시 세끼 밥 먹듯이 할 때였고 누적된 피로에 상당히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새벽 2시에 퇴근해 집에 갔는데 현태가 잠을 안 자고 있었다. 내가 올 때까지 퇴근 후 독박 육아를 하고 있던 남편은 기절 직전이었다. 현태는 계속 안아달라고 울면서 떼를 썼다. 옷을 갈아입지도 씻지도 못하고 애를 건네받아 어르고 달래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현태는 몸이 아팠던 건지 쉽게 잠들지 못했고, 결국 애를 안고 선 상태로 밤을 꼬박 지새웠다. 다리도 손목도 허리도 머리도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당장 아침이 되면 발표를 하러 가야 하는데… 한숨도 쉬지 못하고 선 채로 새파란 아침을 맞이하는 순간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져 버린 것 같았다. 현태에게 미친 듯이 화가 났다. “나보고 어쩌라고!” 하면서 마구마구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깜짝 놀란 그 작은 얼굴의 동그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뚝 떨어지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어떻게 아침을 맞았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냥 일이고 육아고 뭐고 다 도망가고 싶었던 것 같다.     




워킹맘 11년 차, 이제야 일과 육아 사이에서 내 나름의 균형을 잡아가는 듯하다. 그 중심은 워킹맘이라고 무조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에 있다. 아이가 아픈데도 야근을 해야 할 때, 울면서 가지 말라고 매달리는 아이를 떼어내야 할 때, 공개 수업 날 지켜봐 줄 수 없을 때, “학교 다녀왔습니다”라는 날에 답해줄 수 없는 매일매일. 엄마로서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러지 말아야 한다. 정말 힘들면 도움을 구하고 내가 딱 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하면 된다. 내가 두 사람이 아닌 이상, 당연히 두 사람의 몫을 다 잘할 수는 없다. 스스로 노력하고 있음을 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응당 지녀야만 할 것만 같은 워킹맘의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면 육아의 순수한 기쁨조차도 마음껏 누리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 더, ‘희생정신’이라는 자기만족을 버려야 한다. ‘가족을 위해 내가 희생한다.’라는 말은 지극히 이기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 삶이고 내가 낳은 아이들인데, 너희들 키우느라 엄마가 힘들다는 말만큼 아이에게 잔인한 말도 없다. 그건 아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이는 내 소유물도 대체물도 아닌 나를 통해 세상에 나온 독립적이고 고귀한 존재다. 아이를 ‘위해’ 아이 ‘때문에’ 내가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얼핏 고귀하게 들리지만, 오히려 어른으로서 중심과 책임감이 없는 남 탓하는 치기 어린 말이나 마찬가지다. 엄마는 아이와 ‘함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알아야 한다. 스스로 행복을 책임져야 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본인이다. 분명 난 완벽한 엄마는 아니다. 훌륭한 엄마도 아니다. 할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난 늘 행복한 엄마였다. 지태 현태를 키우는 일이 몸은 힘들었을지언정, 단 한 번도 마음으로 힘들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죄책감과 희생정신이라는 마음의 짐 없이 내가 딱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늘 엄마로서 행복했다. 덕분에 매 순간 투명한 아이의 눈을 깊이 바라보며 온 마음을 다해 아이에게 집중하고 더 밀도 있게 사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난 지태 현태의 엄마라는 내 정체성이 너무나 너무나 좋다. 내 소중한 인생 보석들 곁에 오래오래 행복한 엄마로서, 아! 특히 건강한 엄마로서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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