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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Dec 06. 2018

왜 나일까

내가 습관적으로 항상 쓰는 말. 바로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이다. 팀원들은 마치 개인기라도 하듯 이 말을 흉내 내고는 했다. 사실 이 말은 힘든 광고계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내 나름대로는 살기 위해(?) 터득한 주문 같은 말이기도 하다. 상대방의 그저 좋은 점을 바라보고 순수하게 좋은 기대를 하는 것. 설령 서운한 모습을 보더라도 악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그게 내 나름의 업무 신조였다. 물론 기대에 어긋나는 일도 많았고 그럴 때면 거보라며 날 비웃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좋은 사람이라는 자발적 선입견이 내 세상을 평화롭게 유지하는 데는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낯간지럽게도 ‘긍정왕’이니 ‘광고계의 마더 테레사’니 하는 별명들이 따라다녔던 것 같다.    


암 진단을 받은 사람들은 처음엔 그 사실을 부정한다고 한다. 그런 후에는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단계를 밟는다고.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현실을 마주했던 새까만 밤이 생각난다. 왜 나는 암에 걸렸을까? 왜 나일까? 나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주고 싶었다. 크건 작건 늘 옳은 입장에 서고자 노력했고 그 누구보다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새벽까지 야근해도 다음 날 멀쩡하게 일찍 출근하는, 20대 대리들조차 심 국장님 체력 못 따라간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매일 아침 요가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음식도 관리하며 (물론 당근 케이크 앞에서 하염없이 무너지고 매일 벤티 사이즈 카푸치노를 마셨으며 가끔 술자리에서 과몰입하여 즐겼음을 고백하지만) 나름은 자기 관리의 아이콘으로 살아왔는데 왜 나일까. “어이쿠 이거 어쩌죠~ 랜덤입니다!”는 아닐 텐데… 신이 눈앞에 있다면 정말 묻고 싶었다.     


신은 시련을 통해 선물을 주신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삶의 우여곡절이 있듯 나 또한 몇 번의 시련이 있었다.

유년기는 엄마 아빠 없이 지독하게 무서운 호랑이 외할머니 밑에서 살았다. 귤 한쪽 말고 온전한 한 개를 제대로 달라고 똑 부러지게 주장했다가 효자손이 뚝 부러질 만큼 두들겨 맞는 수준의 삶이었다. 그래서 내가 귤을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도 유년기의 시련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눈치 보는 센스와 필살 애교를 일찍 배웠다.

초등학교 6학년이 지나서야 제대로 엄마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잠시 희망에 부풀었지만, 보통의 어린 시절에는 경험하기 힘든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다.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그때 책을 좋아하는 습관이 생기게 된 것 같다.


20대 때는 “자 이제 멋진 인생 시작이다!” 하는 외침이 부끄럽게도 산에서 큰 사고를 당했다. 분무기처럼 비가 뿌리던 날 지리산에 놀러 갔다가 벼랑에서 추락한 것이다. 덩치라도 컸으면 살아남았을 텐데, 이 아담한 엑스스몰 여인네는 벼랑 위 설치해둔 펜스가 무색하게도 그 틈새로 쏙 미끄러져 버렸다. 떨어지며 바위에 얼굴을 직격으로 부딪혔고 두 무릎도 다쳤다. 결국, 왼쪽 턱 디스크와 악관절 수술을 받았고, 왼쪽 오른쪽 두 다리 모두 무릎연골이 파열되어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도 두개골의 상하악 균형이 어긋나는 부작용으로 부정교합이 왔다. 라면 면을 이로 끊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나… 팔자에도 없던 치아교정을 받았다. 그래도 오랜 시간 꾸준히 건강을 회복하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음… 그래 이 정도 시련이면 어디 가서 꿀리지는 않겠다! 신에게 “저는 이제 충분하네요! 더 이상의 시련 속 선물은 노 땡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희망과 무관하게 이미 시련의 챕터는 펼쳐졌다. 난 이제 신을 원망하는 다음 스텝을 밟을지 아니면 그래도 나답게 “좋은 사람, 아니 좋은 신이야!”라고 말할지 선택해야 했다. 사실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좋은 신을 선택했다.


그러니 신이시여… 제가 뭐 잘 봐 드렸으니 저도 잘 봐주세요는 아니지만, 서로 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발 다음 주 전이검사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게 해주세요. 림프도 장기도 뼈도 모두 갓 출시한 신제품처럼 슈퍼 클린하게 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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