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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주말 오전, 맑은 날

의식의 흐름대로 써내려간 하루

by 도랑 그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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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9시, 더 잠이 필요하지 않은 개운한 기분과, 창문을 열었을 때 밀려 들어오는 차갑고 상쾌한 공기가 오늘 하루가 어떻게 전개될지 청사진을 그려주는 것 같다. 출근할 때는 잘 먹지도 않는 아침을 챙겨 먹고, 집을 정리한 후에 오전에 커피를 마시며 읽을 책을 고른다. 이건 옷이 아주 많은, 패션에 상당히 민감한 사람이 오늘 어떤 옷을 입을지 고르는 것과 비슷하다. 하나의 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왠지 읽어야 할 것 같아서 기회가 되었을 때 여러 권 사두었던 새 책 중에 골라보기로 한다. 앙드레 지드나 체호프…. 책을 펼쳐보며 나는 질문한다. '이게 내가 지금 읽고 싶은 책인가?' 결국 나중에 읽으려고 고이 모셔둔 책 한 권을 꺼내 든다. 이 정도의 가치는 있는 날이다.


집 근처 새로 리모델링한 친절한 사장님이 있는 카페로 간다. 그곳은 커피가 맛있거나 인테리가 아주 독특한 것과 같은 그런 특별한 매력은 없지만, 사장님이 과하지 않게 친절하시고 집에서 무척 가까우며, 주말 오전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스타벅스에서 자리를 찾아 헤매서 남들 사이에 끼여서 꾸역꾸역 책을 읽고, 필히 이어폰을 끼지 않아도 괜찮다. 다른 사람과의 거리가 확보되기 때문에, 반대편에서 두 여성분이 얘기하는 것도 그저 책 읽기에 딱 좋은 화이트노이즈가 된다. 모든 것이 다 좋게 느껴질 수 있다... 내가 잘못 시키는 바람에 따뜻한 커피를 받게 된 것도, 테이크아웃하려 가끔 들어오는 사람들의 출입구 종소리도.


책의 두 장을 다 읽었을 때 커피를 다 마시고는 카페를 나온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기도 했고, 방금 읽은 글이 어렵게 느껴져서 다음 글을 바로 읽을 자신이 없었다. 머리에 바람을 좀 쐬면, 불현듯 어떤 구절이 내포한 의미가 선명하게 떠오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건 단지 내가 생각한 것이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나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이 글에서는 이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고, 그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또는 글에서 이 부분이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나? 그런 생각들이 갑자기 날 때가 있다. 작가가 그건 절대 아니라고 뜯어말릴지라도(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는 건 언제나 반갑고 놀랍고 즐겁다. 어느 유명한 철학자가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해서 비판했다고 한들, 우리는 그런 생각을 찾아 헤매려고 책을 읽는 거 아닌가 싶다. 갑자기 일상을 멈추고 머리에 시원한 바람을 쐬는 것 같은 그런 순간을 만들어주는. 지하철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어도 앞 사람의 등짝에서 어떤 영상을 재생해 낼 수 있는 그런 생각을.


산책에는 목적이 없는 것이 더 좋겠지만, 나는 시원한 날씨를 즐기고 돌아다니다 점심을 사 가기 위해서 걷기로 했다. 다시 떠올려보자, 그때의 풍경을. 요즈음 본 적이 없던 새파란 하늘과 4월 초의 싱그러운 햇살과 유난히 세게 불어오는 바람. 그런데 그 바람이 비록 머리를 헝클어트릴 정도로 세게 불기는 해도 춥다고 느껴지지 않고, 적당히 시원하고 쾌적한 느낌. 이어폰을 통해 imagine 노래가 나올 때 이런 날씨에서는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나의 사랑하는 동족처럼 느껴지고, 무슨 공업소나 미용실, 또는 낡은 식당의 간판조차도 소박한 일상의 평화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럴 때는 지나가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없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도 나와 같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것만 같다. 어느 단체에서 가꾼다고 되어있는 작은 묘목들의 푸른 잎은, 자연 그 자체로 느껴지고 도로변에서 차의 매연을 쐬었을 법한데도 얼마 전 내린 비 때문인지 햇빛을 반사할 정도의 투명한 초록색으로 느껴진다.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구립 도서관에서 발이 멈추고, 벤치를 찾으려 외부 계단을 오르다 전에는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문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대부분 이 문을 접하기 전 건물 내부로 이어지는 다른 문을 열게 되기 마련인데, 아무래도 날씨 때문에 그 문을 연다. 옥상 테라스 같은 곳에 의자와 테이블 몇 개가 있고, 더 안쪽에는 정자가 보인다. 테라스에서 서서 보니 예전에 허허벌판이라 출입 금지가 붙어있었던 넓은 공터가 지금은 커다란 주차장으로 변해있었다. 나는 다른 어떤 주말 오전에 실내에서 책을 읽으며, 바로 옆의 공터에서 사그라져가는 잡초들을 보면서 누군가 저곳에서 죽어서 누워있어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는 가을이기도 했고, 하늘이 뿌예서 내 생각의 흐름에도 먼지가 끼어 있었던 게 아닐까 한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둘이 올라와서 즐겁게 논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고 큰 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다. 카페에서 그런 걸 봤다면 싫었겠지. 그런데 지금은 테라스이고, 바람도 아주 쾌적하고, 좋은 음악 때문인지 책을 읽는 것에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


그 이후의 일정은 집에 돌아오는 여정이다. 똑같은 길을 같은 음악을 들으며 돌아오는데 아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아까보다 걸어 다니는 사람도 많아지고, 거리도 그저 그렇게 보인다. 그 시간을 그때 즐기지 못하면, 이미 지나가 버린다. 나중에 재현해 보려고 해도 똑같이 느낄 수는 없다. 그건 반복 재생이 가능한 영화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까 현실을 사는 우리는 마음이 내킬 때 행동하고 느껴야 한다. 오늘 날씨가 좋다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책 한 권이라도 싸 들고 밖에 나가서 햇빛을 쐬고, 목적지를 딱히 정하지 않고 걸어보기도 해야 한다. 그런 것이 별거 아니지만 인생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이 아닐까. '행복'이라는 것을 진짜 느낄 수 있는 찰나의 햇살과 바람. 나는 그런 것 때문에 그나마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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