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초적인 것들에 예민한 사람이다. 다른사람들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특히 나는 더 그렇다.
20대 초반에는 배고픔에 약했는데, 최근에는 배고픔 + 추위에 특히 약하다. 배가 고픈 상태가 지속되면 매우 예민해지고 화가 난다.
배고픈 상태에서 누군가가 장난을 치면 격하게 화를 내는 경우도 많다. (그게 아니라도 내가 화를 자주 낸다고는 하더라) 여하튼 개인적으로 배가 많이 고프면 역치가 급격하게 낮아진다. 그래서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도 체력 안배 + 배고픔관리 에 특히 신경을 쓰는 편이다. (쓰고 보니 진짜 웃긴다. 배고픔 관리라니. )여하튼 배고픈 상태가 지속되는걸 되게 싫어하고, 배고픔 -> 예민해짐 -> 말이 없어짐. 의 루트를 밟는다. 일을 할 때는 배고픈 상태라도 괜찮은데, 왠지 데이트를 할 때 배가 고프면 그렇게 싫더라.
예전에는 남자친구와 데이트 할 때 배고프면 그 예민함을 가감없이 발산했다. 그도 그럴것이 오래 알던 사이기 때문에 배고프면 내가 예민해 진다는걸 잘 알고 있어서,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배고프면 빨리 그 상황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내가 어느정도로 화를 내는 사람인지 잘 알기 때문에 걍 내 맘대로 굴어도 상대방의 예상범위안에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이 안됐다. (아, 물론 아주 무례하게 굴진 않았다. 그럼 바로 싸우는거지 뭐.)
앞의 글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지금의 내 남자친구는 나의 일상에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서, 나에게 아주 익숙하지만은 않다. 이 말인 즉슨, 내가 예민하고 배고픈상태일 때 내가 원하는대로 마음껏 불편함을 발산하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래서 지금의 연애가 조금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활동량이 매우 높은 데이트를 하고 나서 나는 체력도 매우 떨어진 상태였고, 계속해서 추위에 떨었고, 배가너무고팠는데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가 지속됬었다. 사실 매우 힘들고 예민한 상태였다. 하지만 내 감정을 마음대로 발산하기에는 이 사람도 꽤나 지친 상태였고, 나의 상태를 살피느라 피곤해 하는 게 느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절제하면서 빨리 이 힘든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방향으로 데이트 코스를 정했다.
그리곤 숨도 안쉬고 밥을 몰아서 먹었다. 어느정도 배고픔이 해소되니까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챙길 기운이 생겼다.
"내가 배고파서 예민하게 구는거 힘들었어요?"
"음.. 힘든건지 화가난건지 배가고픈건지 아니면 배가고파서 화가난건지 좀 잘 파악이 안되서 어려워요."
"다음부턴 최대한 빨리, 자세하게 내 상태를 공유할게요"
사실, 안그럴게요. 라고 대답할까 했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없는거였다. 나에게는 배고프고 춥고 피곤하고 힘든 상황을 견디는 것도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특히 배고픔) 나름 절제하고 인내하는게 최선이었다. 해서 내가 아예 안그럴 수는 없으니 최대한 당신이 나를 살피느라 힘들지 않도록 자주 많이 공유하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많이 편한 사이였다면 정말 많이 짜증냈을 것 같은 하루였는데 우리 사이가 그렇게 까지 편하지 않아서(?) 나는 당신을 배려하고 당신도 나를 배려해 줘서 하루가 잘 마무리 되었다. 마냥 편하고 익숙한게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적당히 편하고, 조금은 불편해서 오히려 하루를 좋게 보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을 잘 알수 없어서 조금 더 당신을 신경쓰고, 조금더 당신을 배려하고 더 노력할 수 있었다. 서로를 신경쓰고 배려하고 아끼는건 당연한건데, 연애를 하다보면 그게 당연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지 않을 때 조금씩 마찰이 생기는거 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당신이라서 불안했는데, 요즘은 조금은 익숙하지 않은 당신이라서 더 열심히 예쁘게 연애를 하게 되는 것 같아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