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11주쯤 되니까 입덧이 꽤 가라앉았다. 우리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 물도 못 마시고 한참을 토했다고 하던데, 나의 입덧은 크게 격렬하지 않게 지나간 듯하다. 친정에서 올라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산부인과 정기 검진이었다.
임신 초기에는 2주에 한 번씩 병원을 갔었는데, 이번 진료부터는 4주에 한 번 진료 보는 것으로 주기가 좀 널널해졌다. 입덧이라는 이벤트를 겪으면서도 내심 속이 좀 울렁거리는 이 상태 말고는 딱히 평상시와 내 몸과 마음에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 심심하게 느껴졌다. 임신으로 인해서 생명이 내 몸속에 있다는 게 딱히 와 닿는 무언가가 거의 없는 시기였다. 초음파로 보이는 아기의 모습은 작은 세포 덩어리에 가까웠기 때문에 딱히 엄청난 임팩트는 없었다. 그냥, 아- 지금 내 안에 저런 게 있구나 하는 정도? 아기 심장소리를 들을 때는 조금 신기하긴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작은 세포가 저런 심장소리를 내는구나' 생각이 들었을 뿐 딱히 엄청나게 감동이 밀려오고 눈물이 나고 그렇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임신 일기를 보면 심장소리를 듣고 울었다는 사람도 많던데, 나는 눈물은 안나더라.
감정 기복도 있는 편이고 눈물이 꽤 많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병원 진료실에서는 긴장을 해서 그런지 감정적으로 동요된 적이 없다.
이렇게 임신 기간 내에 무덤덤한 나였는데, 임신 12주쯤 받으러 간 진료실에서는 꽤 많이 놀랐다. 지금까지는 초음파 모니터에 항상 동그란 까만 점이 찍혀있었는데, 이번에는 제법 사람 모양을 갖춘 무엇인가가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우와!' 하고 소리를 냈다.
'와, 진짜 사람 모양이네요'
화면 속 애기는 (이제는 진짜 애기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모습이었다.) 머리와 팔다리가 화면으로 구분될 정도로 자라 있었다. 손으로 만세를 했다가 이리저리 휘적였다가 하는 모습이 초음파 화면에 잡히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져서 초음파를 보는 내내 '우와.. 우와...' 하고 계속 놀라는 소리를 냈다. 이 날 집에 돌아와서 초음파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 봤는지 모른다. 남들이 보면 이게 뭔가 싶은 화면이지만 아기가 손을 휘적이고, 몸을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아 진짜 아기가 내 안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괜히 웃음이 났다.
12주 차 검진을 마치고 나서 가족이 아닌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임신소식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너무 초기이기도 했고,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가족이 아닌 주변 사람들에게는 임신소식을 전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때 사람 모양으로 꿈틀대는 아기를 보고 내 맘속에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애기가 자리 잡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시기라서 괜히 자랑하고 싶었다. :)
입덧이 잠잠해지고 나니 본격적으로 음식을 챙겨 먹기 시작했다. 원래 집에서 음식을 열심히 해 먹지 않았었는데 임신을 해서 그런지 엄마가 해주던 음식들, 친정 집에서 먹던 음식들이 자꾸 생각났다. 이런 음식들은 우리 집 스타일로 조리한 우리 집 맛(?) 음식들이기 때문에 나가서 사 먹을 수도 없었다. 이맘때 쯤에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내가 직접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태교랍시고 거창하게 뭔가 하는 건 없어도, 몸에 들어가는 음식은 아기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것 같아서 뭐든 만들어 먹어보려고 애썼던 시기이다. 먹고 싶은 게 있으니 이것저것 애써서 만들어 보기 시작했는데, 음식을 해 먹는 일이 힘들고 번거롭긴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할만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해서 열심히 이것저것 만들어 먹었다.
12주 차가 지나고 14주 차쯤 되니 배가 점점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임신 전에 입던 바지를 모두 입을 수 있었는데, 이때부터는 배가 조금씩 나와서 임신 전에 입던 바지를 입기 힘들어졌다. 겉에서 보면 뱃살인가? 싶은 수준인데 막상 옷을 입으면 느낌이 달라서 이때부터 임부복 사이트를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배가 나오기 작하니 바지뿐만 아니라, 속옷도 맞지 않아 져서 임산부용 속옷과 바지를 하나씩 사기 시작했다. 임신 전에 임부복 디자인을 보면서 '아 정말 내 스타일 아니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정작 닥치니 맘에 들지 않는 스타일이라도 어쩔 수 없이 몸에 맞는 걸 찾아 입게 되더라. 여기저기 찾아보니 원피스가 짱이라고 하던데, 치마보다 바지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원피스는 입고 싶지 않았다. 아직까지 배가 두드러지게 나온 건 아니니 어찌어찌 배부분을 감싸는 형태의 바지를 찾아서 입고 다녔다.
한 14주 차 까지만 해도 몸이 무겁다거나 불편한 느낌이 거의 없어서 임신 전처럼 몸을 가볍게 움직이며 다녔기 때문에 임신을 해서 몸이 힘들다는 생각은 안 했다. 행동이 큰 편이라, 친정에 있을 때 엄마에게서 몸을 그렇게 확확 쓰면 나중에 시간 더 지나면 힘들어진다고 몸을 조심히 움직이라고 잔소리를 들었는데, 이때는 몰랐다. 곧 몸을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임신 중기 이후의 이야기는 투비 컨티뉴...
꿈틀대는 기쁨이 영상으로 이번 글을 마무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