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아빠 너무 사랑해요 - 지금 생각하면 항상 눈물이 나는 투병기
8살이 되던 해, 춘천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암세포는 이미 임파선까지 퍼진 상태였고,
결국 수술을 마치지 못한 채 서울 병원으로 다시 올라가게 됐다.
그제야 내 병은 병원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다.
갑상선암은 주로 중년 여성에게 나타나는 병이었다.
5살 어린 여자아이가 이 병에 걸린다는 건 너무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초기 진료에서 내 병은 그저 ‘단순 물혹’으로 오진되었다.
부모님 말씀에 따르면,
내가 5살에 받았던 첫 진료 기록은 병원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오진을 했던 의사가 나중에 부원장이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당시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때 정밀 검사를 받았더라면,
혹시 오진이 아니었다면,
나는 임파선까지 절제하는 일은 없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결국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서울에 계속 살았다면, 내 동생은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결국 오진도 내 인생에 필요했던 운명 아니었을까.
나는 이렇게 매번 긍정적인 결론을 내려보는 편인데,
그게 30년을 암환자로 살아오면서
크게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나만의 방법인 것 같다.
8살에 큰 수술을 두 번 받고,
9살에는 기억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동위원소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치료 자체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문제는, 완전히 격리된 1인실에서 3박 4일을 혼자 보내야 한다는 것.
9살 여자아이에게는 너무나도 외롭고 무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더 힘들었던 사람은,
우리 아빠였을지도 모른다.
당시 아빠는 춘천에서 서울까지 무궁화호 첫차를 타고 올라와
아침마다 의자도 없는 병실 앞에 서서 나를 조용히 지켜줬다.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막차를 타고 춘천으로 내려갔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들고 가슴 아팠을까.
이제 나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보니
그 마음이 조금은 상상된다.
IMF가 터지던 시절,
아빠는 화물차 운전 일을 잃었다.
그 와중에 집에는 갓 돌 지난 아기(내 동생)와 엄마가 있었고,
딸은 암 치료를 받고 병원에 격리되어 있었다.
가난했고, 정말 돈이 없었지만
아빠는 친척들에게 돈을 빌렸고,
군인이셨던 고모부는 병사들에게 헌혈증을 모아
내 수술에 써달라고 가져다주시기도 했다.
춘천에서 암이라는 걸 알고 다시 서울 병원에 올라갔을 때,
입원 절차가 계속 지연되자
아빠는 병원 원무과에서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돈 있어요! 돈 없어 보인다고 사람을 이렇게 무시합니까?”
아빠가 그렇게 소리치는 모습은
내 기억엔 없다.
하지만 그 장면은 상상할 수 없다기보단,
그만큼 절박했고,
그만큼 나를 지키고 싶었구나 싶어 마음이 아프다.
그 시절 모두가 나를 걱정하고, 사랑해 주셨다.
그중에서도, 남에게 부탁하는 걸 정말 어려워하던 아빠가
그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고
나를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이
지금도 마음 깊이 아프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아빠는 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
조용히, 묵묵히 나를 키워주었다.
(물론 엄마도 언제나 내 곁에 함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 큰 사랑에 비해
아직도 다 갚지 못한 것 같아,
참 고맙고,
참 미안한 마음뿐이다.
옛 경춘선을 달리던 무궁화호는 김유정역에 가면 관광명소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