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30분. 산행에 필요한 짐들을 가방에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10kg쯤 되려나? 이걸 들고 산을 오를 수 있는가! 정녕!! 웃음밖에 안 나온다.
아직 큰 가방을 울러메는게 익숙지 않아, 멜 때마다 몸이 좌우로 비틀거리고 앞뒤로 쏠리고 난리다.
예전에 본 영화 '와일드'에서 리즈위더스푼이 혼자 트레킹을 하러 떠나며 무시무시한 짐을 짊어 메고 가는데, 그 짐의 별명을 '몬스터'라고 지어준 것에 착안하여, 나도 나의 가방을 '몬스터'라고 칭하기로 했다.
몬스터와 나는 3박 4일간 산에서 무척 친해질 예정이다.
뒤로 넘어갈라!
1일 뒤. 나와 몬스터. 우리 조금 친해진 듯?
버스를 타고 Pudeto로 향한다. 여기에서 배를 타고 Paine Grande 산장으로 가게 된다.
버스를 타고 얼마 안가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웅장한 산봉우리들은 계속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나의 감탄을 자아냈고, 배에서 본 설산 또한 앞으로의 산행을 기대케 한다.
꽤 오랜 시간 배를 타고 도착한 산장. 이곳에 짐을 맡겨놓고 오늘의 트레킹을 시작하게 된다.
오늘은 Grey 빙하를 보고 산장으로 돌아오는 것이 목표! 어제저녁에 싸두었던 샌드위치를 얼른 먹고, 간단한 짐만 챙겨 등산을 시작해 본다.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앞날이 좀 걱정되긴 했지만 걷다 보니 바로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유명한 트레킹 코스이고 산장이 전체 예약 마감이 될 정도이니, 사람이 많을 것을 걱정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드문드문 몇몇의 트레커들을 만났지만 혼자 걷는 시간이 많았다.
등산에 익숙지 않은 온이는 걸음이 아주 느리기 때문에 같이 걷기 힘들어 거의 각자 걸어서 목적지에서 만나는 식이었기에, 걷는 동안에는 오롯이 혼자였다.
나의 숨소리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념에 빠지기 좋은 정적 속에서 잠시 숨이라도 멈추어 보며 정적을 즐겨본다.
일상에서는 결코 느끼기 어려운 완전한 정적.
그 어떤 듣기 좋은 음악보다도 아름다운 정적이었다.
조용히 산길을 걸어 첫 번째 뷰포인트 Laguna Los Patos에 도착한다.
넓고 깨끗한 호수는 잔잔하다 못해 유리를 깔아놓은 듯했고, 물오리가 만들어내는 완벽한 원형의 동심원 파형만이 간간히 물을 움직이는 듯, 물은 가만히 산을 비추고 있었다. 이렇게 넓고 장엄한 광경은 아주 오랜만에 만나기에 한동안을 넋을 놓고 상념에 빠졌다.
Laguna Los Patos
좀 더 걸어 오늘의 목적지 Mirador Lago Grey에 가는 길. 깨끗한 계곡물도 좀 퍼마시고 신나게 걷다가 갑자기 빙하를 만났다. 유리 같은 호수에 빙하 조각이 떠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혀 생전 본 적이 없는 색깔의 빙하는 너무 의연히 그곳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물에 떠있는 작은 빙하 한 조각이 나를 이렇게 흔들어 놓다니... 외계인이라도 만난 듯했다.
여행 준비 시에 사진으로 그렇게나 보았던 빙하였는데... 실제로 본다고 별다른 감흥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내심 걱정 중이었는데... 겨우 빙하 조각 하나에 가슴이 이렇게 설레는 걸 보면 나도 참 개복치다. 감정 개복치.
엄청 쪼매낳게 보이지만 개복치에게는 충격적이었던 빙하!
Mirador Lago Grey는 정말 하루 종일 있으래도 있을 정도로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중에 산장지기 아저씨한테 우연히 듣기로, 오늘 우린 아주 운이 좋았다고 한다. 바람 한 점 없는 이런 좋은 날씨는 잘 없는 날이라고...
오늘은 정말 바람이 한 점 없었다. 그러니 아주 고요했고, 아주 정적이었다.
몇몇의 트레커들이 반정도 드러누워 호수와 빙하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나도 잠시 그들과 시야를 공유한다.
정말 내려오기 싫었다.
그러나 어쩌리... 내일 또 만만찮은 산행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내일은 총 20km가량을 걸어야 하고, 그중 12km이상을 몬스터를 메고 걸어야 하는 날이다. 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