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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May 18. 2024

6. 슬픈 도시를 만나다

2024. 3. 5 산티아고에서의 하루

  산티아고로 날아가는 마지막 10시간여의 비행의 초반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에 취해 자다 깨다를 백번쯤 반복하며 맛없는 기내식을 거의 무의식 중에 받아먹었다. 마지막 3시간 정도는 지옥이었다. 발등과 손끝까지 부어오르고 온몸이 뻐근해서 당장 달리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으로, 지루하게 흐르는 시간을 버티었다.


  결국, 우리는 난생처음 남미의 땅, 칠레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관 앞에 선 우리. 항상 입국 심사대에서는 뭘 잘못한 것도 없는데 늘 긴장되고 초조하다.

무뚝뚝한 얼굴로 사무적인 일을 하는 사람 앞에서... 긴장감을 뚫고 온이가 갑자기 먼저 입을 연다.

  "Aprendo espanol para viajar. (여행을 위해 스페인어를 공부한다)" 라며 상황을 무시한 뜬금 발언으로 심사관을 웃긴다. 심사관이 웃으며 나보고 "Y tu? (너는?)" 라는데, 무방비였던 나는 "Me tambien! 아니 아니, Yo tambien!"이라며 무려 3개 국어가 포함된 대답을 했다.... ;;;

  온이 덕에 이렇게 웃으며 어영부영 입국심사는 무사히 통과! ㅋㅋㅋㅋ




  산티아고에서 하루만 지내고, 다음날 새벽 이른 비행기로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바로 이동하기로 되어있었기에, 산티아고 시내를 잠시나마 구경할 시간은 오늘 오후까지 뿐이다.

새벽 비행기 탑승을 위해 가까운 공항 호텔을 예약해 두었기에 호텔에 짐을 두고 바로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한다.


  산티아고 시내를 구경하며 걸어 관통하여 산크리스토발 언덕까지 올라갔다가 복귀하는 것이 우리의 일정.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며 이 도시의 시내라고 할 수 있을 곳들을 느끼며 지나갔다.

  나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이곳은 아주 크고 인구도 많아 보이는 대도시였다. 그런데 상당수의 사람들의 삶의 질이 좋지 않아 보였다. 다들 힘들게 살고 있는 느낌. 길에서는 역한 지린내가 반복적으로 풍겨왔고 길가는 쓰레기더미였다. 증권맨 같이 잘 차려입은 사람들도 종종 보였지만 대부분의 서민들은 행색이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르마스 광장에서는 악취가 풍겼고, 담배와 대마초로 의심되는 것을 피워대는 사람들이 지치고 의심 많은 눈빛으로 힘없이 앉아있었다. (심지어 분수대에서 빨래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르마스 광장 분수대


  길에는 노점상들이 줄을 지어 있었는데 도대체 이 물건들 중 살만한 게 하나라도 있을지 의문인 노점상이 더 많았다. 공짜로 줘도 쓰기는 힘들 것 같은 낡고 오래된 물건들을 바닥에 빈틈없이 깔아놓고 본인도 굳이 팔 생각이 없다는 듯, 의욕 없는 표정으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떤 신발은 진짜 거짓말 안 보태고 누가 10년은 이미 신은 것 같았는데, 중고 시장이어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대부분의 건물은 노후했고 중심가를 조금 벗어나자 유령도시를 보는 듯, 문 닫힌 가게들과 죽은 나무들이 즐비했다. 가끔 공들여 그린 듯한 멋진 그라피티가 나타났지만 건물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곳이 많았고 황폐한 느낌이었다.





  이곳의 속사정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 사회 문제 연구가도 아니고, 칠레 역사 정치 경제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한낱 하루 지나쳐 가는 나그네 여행자로서, 단 몇 시간 이 도시의 번화가를 걸으며 느낀 것이 다이지만, 나는 슬퍼졌다.

  힘들고 생기 없어 보이는 표정의 사람들이 길가에 내몰린 것 같아 보였고, 보이는 풍경은 대부분  황폐했고 더러웠으며 길에는 온갖 쓰레기와 개똥이 난무했지만 모든 이들은 그게 당연하다는 듯 그 위에서 살고 있었다.


  산크리스토발 언덕에 올라 시내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시내 전경은 서울 못지않았다. 엄청 넓었고 마천루도 곳곳에서 보였다. 찾아보니, 산티아고의 면적은 서울과 비슷하다.

  이런 대도시에서, 한 국가의 수도에서, 겉으로 슬쩍 봐서는 경제가 활발히 성장하고 있을 것만 같은 큰 도시에서, 내부에는 여행자의 눈에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시민들이 있다.

  내가 몇 시간 느낀 이 도시가 실제로 그런 도시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산티아고는 힘들고 지친 사람들의 도시로 기억될 것 같다.





  어떤 곳을 여행할 때, 특히 도시를 여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의 분위기와 문화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분위기가 좋고 문화가 독특하면 좋은 기억이 오래 남는다.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문화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스페인식 건물과 성당 등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종종 눈에 띄었지만 그것은 스페인의 양식이었고, 심지어 스페인 본토의 것보다 당연히 부족했다.

공산품들도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볼 수 있는 흔한 물건들이고 칠레산은 거의 보기 힘들었는데, 있다면 질이 좋지 않아 보였다. (와인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술을 전혀 할 줄 모른다.)

  물건을 살 때, made in Korea를 가장 선호하는 우리나라 국민의 자부심과,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말하자면 끝도 없는 우리나라의 문화를 생각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복이 많은 민족인가.

  우리의 독자적인 개성과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산티아고에서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 우리는 얼른 숙소로 복귀해서 여독을 풀어보기로 한다.

  내일은 드디어 Torres Del Paine Trekking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푸에르토 나탈레스라는 작은 도시로 국내선을 타고 이동한다. 새벽 5시쯤 숙소를 나서기로 하고 기절하듯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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