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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개 Jul 03. 2024

19. 내 아픔을 잠시 맡아주렴.

2024. 3. 18 Beagle channel tour

 El fin del mundo.

대서양과 태평양이 만나는 길목에서 형성된 비글해협. 이곳에는 낡은 등대가 하나 있다.

실제 지리적으로 세상의 최남단은 아니지만, 세상의 끝이라는 symbol이 된 이곳.

이번 여행의 시작부터 의미부여를 하고 있었던 곳이다.

우리나라에서부터 시차 12시간의 정 반대 위치인 데다가, 세상의 끝이라니....

나의 일상이 묻어있는 곳으로부터 가장 먼 이곳에 오면 내가 처한 슬픈 상황에서부터도 가장 멀리 떨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비글해협 투어는 오전 10시 시작이었다. 그렇게 크지 않은 배를 타고 오랜 시간 바다 위에 있어야 한다.

나는 뱃멀미가 아주 심한 편이다. 이탈리아 아말피에서 아름다운 푸른 동굴을 보러 갔을 때도, 멀미를 너무 심하게 해서 푸른 동굴이고 뭐고 구역감 참았던 것 외에 아무 기억이 없었다. ;;;

이번에도 멀미를 할 까봐 겁을 잔뜩 먹고 미리 멀미약을 챙겨 먹었다. 오오..... 멀미약이 효과가 아주 좋았던 걸까? 이번엔 멀미를 거의 하지 않고 투어를 끝낼 수 있었다!! 이런 행운이 ㅠㅠ


우리의 투어 보트

 

  비글해협을 가로지르며 시원하게 달리는 배 위에서, 남극과 그다지 멀지 않은 이곳의 쨍하게 청량하고 기분 좋게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얼어 죽기 직전에 배 안으로 들어와 살짝 쉬어주어야 한다.) 설산의 풍경과, 깨끗한 바다, 각종 동물들을 보는 이 투어는 총 4시간 정도로 이루어졌고, 깨발랄하고 웃음 많은 귀여운 아가씨 가이드와 함께였다.

  어떤 섬에서는 바다사자들이 무리 지어 쉬고 있는 가운데, 옆에는 가마우지와 각종 바다 새들이 떼 지어 앉아 있기도 했고, 운이 좋게도, 나는 난생처음 고래의 등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잠깐 등과 숨구멍에서 나오는 물줄기를 본 게 다였지만, 그 아래 엄청 크고 멋진 지상 최대의 포유류가 유영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내 상상 속에서 나는 이미 고래를 직접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졌다. ㅎㅎ

뿐만 아니라, 돌고래가 수영하며 물 위로 점프하는 모습도 잠깐 볼 수 있었다. 세상에... 기대치 않았던 행운이 계속되는 가운데, 배는 계속 항해하여 세상의 끝 등대로 향하였다.



저부르셨나용?





  붉은색의 등대가 멀리서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결국... 세상의 끝에 와있다.

낡은 붉은 등대와 주변을 날아다니는 바다새들, 지금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이 등대는, 세상의 끝에 쓸쓸하지만 의연히 홀로 바람을 맞으며 서있었다.

양조위, 장국영 주연의 영화 해피투게더에서 아휘의 아픈 사랑을 묻어둔 그곳.

나는 이곳에 무엇을 묻어두어야 할까.


                                                                            



  미안하지만, 나도 내 아픈 기억을 이곳에 버려두고 가려한다.

그가 했던 모든 아픈 말들. 내게서 나온, 나도 상상치 못한 방어적 태도. 평생 나와는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던 잔인하고 폭력적인 상황들이 나에게 닥쳐왔던 끔찍했던 기억들.

앞으로도 완전히 잊기는 어려울 트라우마와 내가 다시 가지려면 아주아주 오래 걸릴 어떤 믿음이나 기대감에 대한 미련.

모두 두고 갈 생각이다.


  내가 언젠가 이곳에 다시 돌아와, 그때 즈음엔 희미해져서 더 이상 나에겐 아픔이 아닌 쓸모없는 기억이 되었을 때, 그때엔 웃으며 고맙다고 하려고 한다.

 '안녕, 내 아픔을 맡아주어서 고마워.  그 기억이 지구 반대편에서 내 삶을 괴롭히지 못하게 해 줘서 고마워.'




  멀미를 하지 않으니, 배를 타고 진행하는 투어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구나.

이탈리아 아말피 푸른 동굴의 악몽에 사로잡혀있던 나는 오늘 멀미 없이 무사히 투어를 마친 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시릴 정도로 파란 바다와, 풍부한 먹이를 잡아먹으며 풍족히 살아가고 있는 듯이 보이는 다양한 야생동물들, 낡은 등대. 이곳에 온 충분한 이유가 된다.


                                                                                                                                                        




  저녁엔 el viejo marino라는 유명한 식당에 가서 킹크랩 요리 몇 가지를 먹고, 우수아이아의 야경을 즐기며 조금 걷다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은 갑자기 35도가 넘는 한여름 기온의 지역으로 날아가는 날이다. 여행의 장르가 바뀐다.


                                                                            




  언젠가 다시 올게, 우수아이아.

El fin del mundo. 나의 아픔을 잠시 맡아주렴.

쨍하게 코 끝에 닿던 남극의 바람이 한동안 그리울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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