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한 줄 발제 : 살면서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이 있을까.
-책을 읽고 나서-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내용이 너무 짧다며 같이 부연된 설명이 있었다. 작가가 최대한 필요 없는 것들을 줄여서 그래서 필요 없는 단어를 쓸데없이 중언부언하지 않았다고. 소설은 꼭 필요한 단어들로만 이루어져서 굉장히 짧고 단순하다고. 그래서인지 읽으면서 문장 하나하나 어떤 의미일까 고심하면서 읽어 내려갔다. 이 문장이 없앨 수 없는 중요한 문장이었다고? 하지만 읽는 내내 소설의 문장들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하나 차분하게 이어지는 그냥 소소하고 단조로운 일상들인 것 같은데. 그냥 너에게도 나에게도 있을 법한 그런 크리스마스 전날의 케이크나 선물 고르기 같은 그런 아무렇지 않은 보통의 일들.
첫 문장부터가 낯설었다.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는데 11월이 되다니. 1984의 열세 번째 종소리 같은 암시일까. 전혀 가늠할 수가 없다. 나한테 너무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우선 읽어보자. 다행히 내용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문장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간결하게 읽혔다. 마음이 길게 묘사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의 연속. 의미 있을지 없을지 모를 이상이지만 그저 평범해 보이는 그런 삶. 즐거운 크리스마스 휴일을 보내기 위한 바쁜 일상과 약간은 사소한 균열. 다들 잘 모른다고 하지만 사실은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는 느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소설은 전체적으로 약간은 어두운 분위기지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담담하게 따라가고 있다. 소설에 목소리가 있다면 차분하고 높낮이 없는 잔잔한 그런 어조로 읽어 내려갔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잔잔한 일상 속에서도 어느 곳에서는 살기 힘든 괴로움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괴로움을 몰라도 되는 걸까.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작은 것들을 못 본 척 못 들은 척 흘려보내면 되는 걸까. 하지만 내가 만약 그 당사자였다면, 그래도 나는 그렇게 모른 척할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가정이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도 그렇게 흘려보낸 일들이 많을 것이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관련이 없는 사람이니까 지금 잠깐 눈 감으면 되지,라며 지나친 괴로움들이 얼마나 있을까. 마지막에 펄롱이 용기를 낸 순간조차도 책은 잔잔하게 읽혀 내려간다. 전혀 긴박함 없는 일상인 것처럼. 평소와 조금 다르게 행동했을 뿐이지만 그 소녀에게는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게 되는 일이겠지. 아마 펄롱의 인생도 같이 바뀌겠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이야기가 끝났다. 작가의 덧붙인 말을 보니 막달레나 세탁소 이야기가 나온다. 막달레나. 성경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죄 많은 여자. 결국은 참회를 받았지. 그 사람의 이름을 딴 세탁소라니. 세탁소가 갖는 느낌도 무언가 상징적이다. 세탁을 해서 희고 깨끗하게 만들겠다고. 무엇을 세탁하려고 했을까. 더럽지 않은 것에 더럽다고 이름을 붙이고, 더럽지 않은데 깨끗하게 하려고 얼마나 괴롭혔을까. 누구를 더럽다고 하고, 누가 깨끗하게 만들 자격이 있을까. 마지막 세탁소는 1996년도에 폐쇄되었다고 한다. 중세 시대 마녀사냥인 줄 알았는데 너무나 최근까지도.
마지막에 한 번 더 읽어 보면 좋다고 하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를 때와 이미 모든 걸 알아버렸을 때 읽게 되는 일상은 또 달랐다. 특히나 펄롱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미시즈 윌슨이 얼마나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자신과 상관도 없고, 가족도 외면한 펄롱의 엄마를 보살피며 펄롱 또한 남부럽지 않게 키워준다. 나중에 펄롱의 아내는 미시즈 윌슨이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뭐든 할 수 있는 사람과 그 일을 하는 사람은 다르다.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 하필이면 왜 그랬을까. 아마 미시즈 윌슨은 뭐든 할 수 있지 않았을 때도 펄롱을 지켜줬을 테지. 미시즈 윌슨 덕분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도 무시당하지는 않고 번듯하게 자란 펄롱. 어쩌면 그도 그렇게 친절을 받았기 때문에, 용기를 받고 자랐기 때문에 베풀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미시즈 윌슨이 그렇게 자라라고 강요하진 않았지만 그 또한 그녀에게 받은 사랑이 켜켜이 쌓여서 그가 용기를 낼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 준 게 아닐까.
보통 고발하는 글들을 보면 피해자의 좋지 않은 모습을 더 부각해서 행동을 유도하는데 이건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 내어 행동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직접적이진 않지만 그대로 그냥 있을 거야? 모른 척할 거야? 라며 끊임없이 물어본다. 모른 척할 수 없게. 과연 나는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지금 내가 못 본 척 지나고 있는 일들이 있지 않은가. 이대로 그냥 있을 거야? 그럴 거야? 괜찮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많이 똑똑해지고 발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어둡고 괴롭고, 옳은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용기를 내기보다는 침묵하는 편이 나은 것 만 같다. 나서봤자 바뀌는 건 없고 무슨 의미인가 싶다. 그냥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걸까. 머리로는 당연히 용기를 내고 행동을 해야지,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움직이지 않게 된다. 나도 펄롱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일상이 사소하다는 건지, 용기가 사소하다는 건지, 사실 행동은 아주 사소한 차이로 바뀌게 된다는 건지. 너무 사소한 것 투성이인데 그중 바르게 선택하기. 옳은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올바른 소신을 가지길.
-책 속 내용-
29.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멈춰 서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은 필요하다. 그저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면 로봇이랑 다를 게 없지 않나.
41. 시간은 아무리 흘러도 느려지질 않으니.
빨라지지도 느려지지도 않는데. 왜 지나고 보면 빠르고, 오지 않은 시간은 길기만 한 건지.
44. 잠시 멈춰 작업을 시작한 지점을 돌아보았는데, 거기에서 벌써 새끼 버섯이 배양토를 뚫고 올라오는 걸 보고 똑같은 일이 날이면 날마다 여름 내내 반복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일한 보람이 없네. 내가 용기 내어 무언갈 하면 바뀌긴 할까.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마는 게 아닐까. 나만 소모되는 게 아닐까.
106. 그 사람들이 갖는 힘은 딱 우리가 주는 만큼 아닌가요?
그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세상.
111.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너무 사소하고 공기 같아서.
119.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받은 게 많으니까 나도 베풀 줄 알아야 하는데. 자꾸 가진 거에 욕심을 부려서 나눠주기 싫고 손해 보기 싫어서 용기 내질 않고. 스스로 돌아보질 않으니 부끄럽지도 않아. 그래서 그냥 기계가 되고 마는 걸까.
120.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은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엇을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나도 사소한 일상들로 아이들에게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
121.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