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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나 Nov 01. 2024

통증의 이름

소통을 어른스럽게

 왼쪽 어깨가 아프다. 처음엔 그러고 말거라 생각했는데 계속 아파서 필라테스 선생님께 승모근이 아프다고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승모근이 아픈 게 아닐 수도 있다며 여기가 아픈가 저기가 아픈가 물어보는데 갑자기 내가 어디가 아픈 건지 모르겠다. 근육이 아픈 건지 뼈가 아픈 건지 승모근인지  어깨 앞쪽인지 뒤쪽인지도 헷갈린다. 이거 어깨가 아파서 병원에 가더라도 어디가 아프다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정확히 이야기를 못할 것 같다. 그냥 내가 대충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하더라도 의사 선생님이 찰떡같이 알아주셨으면 좋겠지만 그게 쉽나. 그리고 병원도 내가 어디가 아픈지 어느 정도 알고 타깃을 맞춰서 가야지 전체적으로 살펴보지는 않는 것 같다. 건강검진을 받더라도 수상쩍은 부분을 더 자세히 봐달라고 해야 하는데 어딜 봐달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부터는 갑자기 등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딱 척추 자리는 아니고 약간 오른쪽 허리인데 근육은 아닌 것 같다. 주로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때 아픈데 몸을 일으킬 때 배에 힘을 주게 되면 등허리가 헉 소리 나게 아프다. 사실 일어날 때 배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처음 알았다. 담이 온 건가 싶은데 아침에만 아프고 일어나서 활동을 시작하면 통증이 사라진다. 자고 일어나면 또 아프다. 이건 대체 어디가 문제인 걸까. 무엇 때문에 아픈지 모르고 아픈 근육을 집어내지 못한 채 나는 아직도 내가 어디 아픈지 정확하게 표현할 줄을 모른다. 근육 이름도 몰라서 여기서 여기까지 아픈 게 하나의 근육인지 여러 개의 근육이 한꺼번에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병원에 가봐야 할 지도 감이 안 오고 가서도 잘 설명할 자신이 없다. 내 설명을 과연 의사는 이해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의사한테는 흔한 통증이어서 듣자마자 바로 알아차릴 수도 있을 텐데. 


 가끔 아이가 복통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잠시 후에 화장실을 가는데 아직 배탈이 난 것과 화장실 배를 구분을 못하는가 싶다. 가끔은 체한 것 같을 때도 있다. 별게 아닌 배아픔일 것 같지만 세상 심각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이는 많은 통증을 겪어 보지 않아서 그런 건지, 경험치가 쌓이지 않아서 그런지 일상적인 배 아픔인지 아닌지 구분을 잘 못하는 것 같다. 그저 배가 아프다고 한다. 쑤시는지, 콕콕 찌르는 것 같은지, 배탈이 난 느낌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점점 경험치가 늘어야 알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냥 배가 아프다고 하면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 알 수 없고 그저 막연할 뿐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답답해진다.


 편두통이 그렇게 아프다는데 나는 그게 어떤 건지 모르겠다. 가끔 머리가 심하게 아팠는데 그게 편두통인지 확신이 가지 않는다.  아직 아이들은 두통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나에게 머리 아프다는 이야길 한 적이 거의 없다. 그러고 보면 어린아이들이 그런 다양한 아픔을 겪지 않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잘 알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좀 더 나이 들면 설명하는 방법이 더 다양해질 수 있을까. 나도 아직 맹장염에 걸린 적이 없어서 가끔 배가 심하게 아플 때면 이 통증이 맹장인가 궁금할 때가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진짜 맹장염이 오진 않았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맹장염의 고통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열났을 때 두통이나, 독감에 걸렸을 때, 쥐가 나거나 현기증 같은 건 이미 알고 있고 표현할 수가 있다. 이미 내가 경험한 통증이고 동일한 통증이 느껴진다면 왜 그런지도 어렴풋이 알 수 있고 비슷한 경험을 했던  다른 사람과도 그 게 어떤 통증인지 대강 이야기해도 알게 되겠지. 가끔 배가 종종 쿡쿡 쑤신다. 누워있으면 그 통증이 바로 사라진다. 고등학교 때 특히 심했는데 집에서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배를 잡고 데굴데굴 했던 적도 있다. 혹시 맹장인가. 아니면 장 앞부분에 구멍이 뚫려서 서있으면 거기로 뭔가가 쏟아져 나와서 배가 아프다가 누우면 쏟아져 나오는 게 없어서 통증이 사라지는가 싶었다. 원인 모를 통증이지만 항상 비슷한 느낌으로 오고 누우면 괜찮아졌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느 날 회사에서 그렇게 배가 아파서 잠시 누워있을게요 했더니 대번에 파트장님이 그거 가스가 찬 거야! 이러는 게 아닌가. 아아. 배에 가스가 찬 거였구나. 이제는 이 통증이 어떤 통증인지 안다. 아마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배에 가스가 차서 아프다고 했을 때 서로 알아들을 수 있겠지. 상대방과 공통으로 인지하는 명칭을 사용하면 서로 자세히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찰떡같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지칭해 주는 이름. 


그걸 정확히 아는 것만으로도 생각을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지역일 수도, 사물의 이름일 수도, 감정의 이름일 수도 있다. 그거 있잖아 저기 이렇게 해서 그런 거. 대명사로 대강 말하는 건 말하는 입장에서는 쉽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뭔지 알 수 없고 약간의 추측을 더해 상대방의 생각을 가늠해야 한다. 내가 말한 내용을 내 의도 그대로 상대방에게 전달했을까. 상대방에 따라 나의 생각이 다르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아닐까. 나의 생각은 이거. 단 하나를 이야기했을 뿐인데 듣는 사람에 따라 오만가지로 내 의도가 바뀔 수 있게 된다. 


 어떤 개념, 혹은 상황은 정확한 이름으로 지칭되어야 한다. 물론 혼자만 쓸 거면 상관없지만 언어라는 건 태생부터가 그렇지가 않다. 사회적으로 통용되어야 하며 자기만, 혹은 그 조직에서만 쓰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우리끼리는 이런 단어를 이렇게 써.라고 할 때는 새로 온 사람에게도 확실히 그 부분을 인지시켜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존 조직과 그 사람이 받아들이는 내용은 서로 다를 테고 그 단어의 중요도에 따라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다.


 자. 그럼 나는 그런 단어들을 잘 골라서 쓰고 있을까.


 단어뿐 아니라 주어와 서술어가 일치하고 맥락에 맞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초등학생 수준의 아이들이 어려운 단어와 상황을 물어봤을 때 아이 수준에 맞는 단어를 제대로 골라서 설명할 수 있는가. 병원에 갔을 때 내가 아픈 부분에 대해 잘 알려줄 수 있나.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내가 원하는 바에 대해 정확히 콕 집어 문의할 수 있는가. 


 표현의 자유가 외부에서 제한되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제한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오롯이 충분히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을까. 내가 하는 말들이 상대방의 오해 없이 제대로 이해되고 있을까. 간단명료하게 나의 의도를 그대로 상대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가. 


 아이가 배드민턴을 칠 때 선생님이나 어른처럼 잘 받아주는 사람이 쳐주면 아이의 수준에 맞춰 반응을 해줄 수 있다. 그래서 여러 번 주고받기도 가능하다. 하지만 같은 수준의 아이 둘이 있으면 한번 던지고 한번 줍고 또 던지고 줍고 가 반복될 수 있다. 상대방에 따라 실력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아이의 실력은 똑같을 텐데 받아주는 사람이 얼마나 수준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아닌 이미 수준급의 사람이라면 스스로가 상대 수준에 맞춰서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지도 않겠지. 아마도.


 대화나 의사소통도 마찬가지다. 내가 똑같이 말했을 때 누구는 이해하고 누구는 다른 소리를 할 수 있다. 그건 내 탓 일 수도 있고 남 탓 일 수도 있다. 내 탓이면 내가 더 많이 경험하고 공부를 더 해야 할 테고, 남 탓이면 내가 맞춰주면 된다. 남에게 맞춰주는 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그 사람이 겪었을 경험의 정도를 생각해 보고 내가 그라면 어떤 부분이 이해가 안 되는 걸까 생각해 볼 수 있으면 된다. 아이가 질문을 했을 때는 그 아이 수준의 어휘를 생각해 보고 내가 이런 단어들을 처음 배웠을 때가 몇 살 때였을지도 생각해 보고 맞춰서 이야기해 준다. 


 VOC로 들어온 문의에 답변을 할 때 보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정확하지 않은 용어로 질문을 하곤 한다. 그 정확한 용어라는 건 아무래도 일로써 대하는 사람이나 분명하게 구분해서 쓰는 거지 사용자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정확하지 않은 문의를 하면 상담자는 정확한 답변을 위해 여러 번 탐색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문의하는 사람은 답답할 것이다. 이미 물어봤는데 왜 그에 대한 답변이 아닌 다른 질문을 하는가. 왜 내 말을  못 알아듣는가. 물론 비슷한 문의가 많다면 다소 애매한 문의라도 문의자 입장에서 무엇이 궁금했을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다가 문제에 봉착했는지 추측하여 원하는 답변을 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무언가 물어봤을 때 상대방이 딱 맞는 대답을 내놓는다면, 그건 상대방이 내 입장에서 충분히 생각하고 답변을 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내 질문에 딴 소리를 하고 있다면 혹시 내 질문이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도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생각보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답을 위해서 상대방의 수준에 맞게 정확한 질문을 해야 하고 그건 생각만큼 쉽게 되는 건 아니다.


 생각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건 어렵다. 

 

 타인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건 여러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입장에 서서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공감이라고 들었었는데. 상대방의 마음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나. 내가 경험하지 못한 상황들까지 공감하는 게 가능할까. 전에 어디서 들었는데 다정도 지능이라고. 배려도 똑똑해야 할 수 있다. 배려를 받아도 배려받은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내가 받았던 배려들을 잘 이해하고 있나. 다른 사람들에게 잘 공감하고 있나. 그리고 배려를 잘하고 있나. 


 사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공감 능력이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나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받고자 하는 마음도 조금 내려놓았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다. 그러려면 그 사람들에게는 우선 내가 먼저 공감하고 배려하고 이해해야지. 그리고 나의 의사와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해서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어른이 되어 갈수록 더 필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당연히 나보다 어린 사람을 만날 경우가 많아지는데 

그들에게 내 생각을 읽어줘라고 마냥 바랄 수는 없으니까. 


2024.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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