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공부해야 할 슬픔
누군가를 꼭 이해해야만 하는 걸까.
모임에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왜 그런 걸까. 아마 저렇게 행동하는 건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는 그는 아마 이러이러한 사람이어서 그런 거겠지,라고 판단을 하고야 만다. 판단. 타인에 대한 범주화는 가장 지양해야 할 부분이라고 했는데.
'폭력이란? 어떤 사람/ 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 -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92page
말 한 번 섞어보지 못한 그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의 이 마음가짐이 폭력이지 않을까. 안돼. 그 사람 나름의 내가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겠지. 하지만 그렇게 섬세하게 생각하기에는 좀 피곤해지는 게 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데 왜 나는 그 사람을 신경 쓰면서 이런 사람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아니야, 이건 폭력이야 하면 안 되는 짓이야,라고 생각하며 혼자 마음이 번다한 것인가.
조금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쉽게 판단하고 범주화시킨다 하더라도 그는 그것을 모른다. 그럼 나는 쉽게 판단해 버리고 그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게 맞지 않을까. 모르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모르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정당한가. 그렇다고 나와 상관없는 사람에 대해 계속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또 맞는 일인가. 가장 좋은 건 차라리 이도 저도 아니게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하는데. 차리리 보이지 않으면 신경이 안 쓰일 텐데 계속 생각의 끝에 걸리고야 만다.
어릴 때는 조금 잘난 척도 했었다. 깊이 알지도 않으면서 몇 마디 말을 나누고 겉핥기식의 관계의 사람들도 내 멋대로 범주화시킨다. 그리고 거기에 맞게 상대방이 행동을 하게 되면 역시 내 판단은 정확해, 나는 통찰력이 있어, 라든가, 상대방을 금세 파악할 수 있어, 하며 자기만족했던 것 같다. 사실은 그게 내가 나도 모르게 행하고 있던 폭력인지도 모르고. 겉으로 보이는 몇 가지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다 알 수가 있을까.
당연히 모르지. 알 수가 없지. 그러면서 단편적인 몇 가지로 왜 타인을 판단할까. 그 사람의 혈액형, MBTI, 학교, 전공, 직업, 취미, 즐겨 먹는 음식, 싫어하는 것들로 너는 그러한 사람이구나.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사실 그런 것들이 범주화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카테고리에 집어넣고 나서는. 그 이후에는? 그 틀에서 벗어나면 습관적으로 질문이 뒤따라 나온다. "너 그런 사람 아니잖아." "너는 원래 그랬잖아.".
나도 가끔 저런 말을 듣는다. 카테고리가 아주 세분화되어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단순화된 카테고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분류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도 내 마음대로 판단인 것 같은데.- 내가 가끔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할 때 저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묘해진다. 나를 너무 단순하고 평면적으로 보는 거 아닌가.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라고 속으로 생각하지만 겉으로 티 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게 나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동안 해오던 습관과 사고방식으로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의견을 개입시키지 않고 그저 습관적으로 몸에 배인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똑같은 생각만 하고 살지는 않을 텐데. 나만 그런가.
분류가 다양하게 되어 있을수록 세심한 기준을 들어 범주화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하나의 카테고리에 그 사람만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단순하게 내편, 네 편으로만 범주화를 시킬 수도 있겠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사람일수록 나의 범주와 먼 카테고리에, 금방 이해되는 사람은 나와 비슷한 카테고리에. 다른 사람은 몇 명씩 묶어서 그룹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도가 떨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묶어서 하나의 범주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사람은 단지 비슷한 카테고리일 뿐 똑같은 카테고리에는 나밖에 들어올 수가 없다. 나랑 놀랍게 일치하는 사람이라니, 벌써부터 싫어진다. 그래서 도플갱어가 만나면 둘 중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건가.
만일 말로 너는 그런 사람이잖아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이미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것도 그에 대한 폭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생각만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베스트셀러 도서 중에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라는 제목이 있다. 기분 말고도 생각도 태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이 태도가 되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해야 할까. 혹시 내 생각도 태도로 나타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다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든다. 그를 꼭 이해해야만 하는가. 나는 꼭 이해받아야만 하는가. 누군가를 범주화시키는 건 내 분류 기준으로 상대를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그를 이해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굳이 그를 카테고리에 분류하려는 시도를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는 그런 사람이야!라고 판단하지 않고 그는 그랬구나.라고 사실만 담아 놓으면 되지 않을까.
다른 사람의 마음속 생각까지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내 마음은 내가 다스릴 수 있어야겠지. 어려서는 안 되던 것이었지만 이제 조금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착하고 싶다. 나는 과연 착한 걸까. 착하려고 노력하는 걸까. 이도 저도 아닌 위선자일까. 가끔, 아니 자주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착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갈팡질팡 하는 내 마음을 다른 사람은 쉬이 판단하고 분류해 버리는 걸까. 나도 모르는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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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