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에 커피를 왕창 쏟았다.
항상 오른쪽에 커피를 두고 마시는데 이 날은 뭔가 어수선하게 두었다. 재택근무기간 포함 책상 위에는 내가 항상 두는 물건, 자리들이 고정되어 있었는데. 이 날따라 달랐다. 생각이 어수선하다. 어떻게 쏟았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다행히 노트북은 꺼지지 않았고 키스킨이 있어서 흠뻑 젖은 건 아니지만 잠깐 검색해 보니 무조건 전원을 끄는 게 좋다고 해서 서둘러 컴퓨터를 종료했다. 노트북을 엎어서 커피가 흘러나올 수 있게 해 두고 휴지도 살짝 얹어 놓았다. 물론 그렇게 해서 흘러나오는 게 있진 않았다. 새 커피컵 한잔을 다 쏟았던 거에 비하면. 당장 서비스 센터에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어서 초조하게 하루를 보냈다. 서비스센터에 방문 전 예약을 할 수 있는데 바로 다음날은 예약 목록에 없고 가장 빠른 게 이틀 후였다. 마냥 기다릴 수 없으니 그냥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다음날 오전에 바로 가니 기다리는 사람 없이 바로 볼 수 있었다. 윈도 11은 비트 라커가 되어 있어서 해제하는데 시간이 넘나 오래 걸렸지만 커피가 많이 들어가지도 않았다며 약품으로 닦아주셨다. 메모리카드와 충전 단자에 조금 묻었고, 저장장치는 무사한 것 같다. 물론 이미 내부에 뭔가가 한번 들어갔기 때문에 지금은 괜찮지만 언제까지 괜찮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꼭 중요한 데이터는 업해 두라고 신신당부.
하루 종일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저녁 무렵. 어제 아침에 쓰던 글이 생각이 났다. 책을 한 권 다 읽고 너무 재미있었다고 신나게 썼었는데. 마저 이어서 써볼까. 컴퓨터를 켰는데. 없다. 그전에 쓰던 건 있는데 어제 아침에 쓰던 글이 홀랑 사라졌다. 이럴 수가. 어디 갔지. 매번 저장을 눌렀는데. 자동 저장도 되는 거 아니었어? 커피를 쏟고 나서 깜짝 놀라 그냥 인터넷 창을 다 닫고 꺼버렸나 보다. 나는 그날 아침 그럼 괜히 커피만 쏟은 거잖아.
신나게 글을 썼던 기억만 남고, 사라졌다. 속상했다.
한 번 신나게 써 내려갔을 때, 다시 쓰게 되면 그때 그 기분이 나질 않는다. 뭔가 김이 팍 샌 느낌. 아무것도 없는 흰 종이에 머리에서 나오는 대로 쓰는 그 기분이 있는데, 두 번째로 같은 걸 쓰게 되면 그 기분이 안 난다. 뭔가 받아쓰기를 하는데 받아쓸 대상이 없어서 난감한 상황. 토씨하나 기억이 안 나서 지지 부진하게 써지는 글. 그 토씨를 찾기 위해 간헐적으로 멍해지기.
왜 그럴까. 왜 속상한가. 그때 그 기분을 느끼지 못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가 왜 흥이 안 나는지. 아. 알겠다. 그때 썼던 걸 그대로 써 내려가려고 하니까 괜히 기분이 가라앉는 거다. 이미 한번 썼다 날렸지만 그 글을 쓰면서 가다듬던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한번 글을 씀으로써 생각은 보다 더 정교해졌을 텐데. 그럼 그 새로운 생각을 적어 내려가면 되지 않을까. 전에 썼던 그대로 쓰려고 하지 말고 지금 이 기분으로 쓰면 되지 않니. 속상해한다고 이미 날려버린 글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때 속사포로 내뱉고 잊혀 버린 생각과 똑같은 강박이진 않았을까. 벼락치기로 시험공부를 하고 나서 시험공부를 하고 나면 홀랑 까먹어서 머릿속이 텅 빈 기분처럼, 생각이 잊혀져 버렸으면 다시 생각을 쌓아야지. 그리고 저번보다는 조금 더 생각이 정교해졌으리라 믿고 써야지. 짜증 내지 않고 다시 쓰다 보면 더 좋은 생각이 어디선가 불쑥 인사하러 나올 거야.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맘 상하지 말자.
이미 벌어진 일 때문에 속상해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 이러고 있지만 속상하다. 속상하다고. 그나마 다행인 건 길게 쓰지 않아서라고 위안을 삼지만. 그 몇 줄에도 이렇게 마음이 심란해지는 건 사라져 버린 글 때문인지, 데미지를 입은 노트북 때문인지.
2024.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