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그런 순간.
책을 점점 더 잘 안 읽게 된다.
그러면서 책을 고를 때 나름대로 엄청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빌리는 건 약간의 충동적일 때도 무척 많지만 구매를 해야 하는 경우에는 이리저리 심각하다. 한 번 읽기 시작한 책은 좋거나 싫거나 완독 하려고 애쓰는 편이고 책이 첫인상과 달리 내 마음에 쏙 안착하지 않는다면 마지막까지 읽는 건 약간의 의리와 의무감으로 읽어 내려가기 마련이니까. 안 그래도 숏폼에 재미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스레드와 브런치와 블로그와 웹소설, 웹툰에도 읽을거리가 얼마나 많은데. 빌려볼 수 있는 책들도 종류가 많고, 종이책이 어려우면 차선으로 전자책도 빌려볼 수 있지. 회사나 도서관마다 계약되어 있는 전자도서관의 도서 수량이 제각각이지만 내가 소속되어 있는 여러 가지를 이리저리 조합하다 보면 베스트셀러의 전자책을 빌려보는 것도 어렵지는 않다. 그래서. 그렇게 공짜로 볼거리들이 넘쳐나는데. 책은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아무리 짧아도 한 시간이고, 3~4시간은 거기에 오로지 몰두해야 하는데. 물론 토막토막 시간을 쪼개어 볼 수도 있지만 역시 아무래도 중간중간 쪼개는 것과 집중해서 보는 건 몰입감의 차이가 크다. 몰입할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하고.
그래서.
점점 더 책 한 권을 살 때마다 고민이 깊어진다. 이건 과연 소장할 가치가 있는가. 내 책꽂이 한편에 자리해서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수시로 꺼내 보면서 볼 때마다 새롭고 재미있을 책인가. 최고의 책을 고르겠다며 쌍심지를 켜지만, 아무래도 책을 제대로 읽기 전에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쉽지 않다. 그나마 매장에서 일했을 때는 항상 책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책의 실물을 위로 아래로 옆으로 밑으로 사이사이 샅샅이 살펴볼 수 있었지만 요즘엔 인터넷서점에서 미리 보기로 휘리릭 넘겨보고 사야 해서 더 곤란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어릴 때 보다 책을 사는 빈도나, 권수가 현저히 줄었다. 요즘엔 아이들 문제집 값으로 책값을 올인하는 편.
아무튼 이리저리 고심해서 책을 사다 놔도 바로 읽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 막상 읽기 시작해도 생각했던 것만큼 와닿지 않는 책들도 허다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가끔 그런 때가 있어. 이 책이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그런 순간. 책을 읽으면서 하나하나 발췌하느라 얇은 포스트잇을 붙여 나가는데 덕지덕지 붙어버린 그런 책들. 문장하나하나가 와닿고 맘에 들어서 자꾸 들여다보게 되고, 들여다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박힌 듯이 생각나는 문장들. 가끔은 삶의 태도에 큰 결정권을 갖고야 마는 그런 글들.
이건 굉장히 주관적인 기분이라 내가 그렇게 본 책을 다른 사람도 같은 마음으로 볼 수는 없다. 그건 아는데, 알겠는데. 그래도 자꾸 알려주고 싶다. 이 책 너무 좋아요, 진짜. 나는 이렇게 읽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브런치에 글 발행이 가능하기 시작하면서 블로그에 있는 글들 중 브런치에 올리면 좋을 카테고리도 가져와서 올리고 있다. 그중 하나가 도서 리뷰였는데 이게 생각보다 많이 귀찮은 작업이다. 그대로 복사해도 블로그에 맞게 편집해서 올려진 글과 사진이 브런치에서는 영 삐그덕 거려서 조금씩 다시 수정을 해줘야 한다. 그리고 그 짧은 기간 포스팅 했던 것들도 예전과 현재가 글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브런치에 새로 올리면서 통일감을 주고 싶었는데 머릿속에 확실히 정해 놓은 게 없다 보니 약간은 산만해졌는데. 이리저리 좋은 포맷으로 바꿔가며 이사 중인데 얼마 전에 발행했던 글이 눈에 띈다.
블로그에서는 발췌와 리뷰를 따로따로 업로드했는데 브런치로 옮기면서 대부분은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서 올렸었다. 왠지 블로그보다는 브런치가 긴 글에 관대한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발췌 부분이 너무 길어서 조금 멈칫. 그렇게 발행하고 시간이 지났는데 뭔가 아쉽다. 다른 리뷰는 다들 발췌를 함께 올렸는데 맘에 드는 글이 많은 이건 발췌를 빼놓다니, 속상하다 속상해. 이 좋은 거 나만 알고 싶지 않아. 마구마구 알려주고 싶어. 물론 리뷰에 발췌의 링크를 걸어놨지만 아마 잘 안 보이니까 모를 거야. 이건 발췌를 봐야지 찐이지! 물론 책을 읽는 게 더 좋고!
발췌를 따로 발행하긴 그렇고, 발행했던 글을 수정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래도 수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제 편집만 하면 돼. 빠르게 훑어 내려가도 어쩔 수 없이 예전에 발췌해 놓은 문장들과 생각을 읽게 된다. 리뷰보다 발췌가 더 좋아. 내 글이 아니라 그런가 봐. 너무 좋아.
숏폼을 볼 때면 쉽고 편하고 시간이 훌쩍 지나가지만 좋은 글을 읽을 때는 뭔가 머리와 가슴에 채워지는 기분이다. 찰랑거리는 이 마음잔을 빨리 마셔버리거나 부어버리거나 비우고 싶은데 또 그럴 때는 글쓰기가 딱이지. 신나게 써 내려가다 보면 갑자기 마음이 공허해진다. 채워졌던 뭔가가 손끝에서 다 빠져나간 기분. 그러면 또 한동안 채워 넣을 것을 찾아서 헤매어야지. 그래서 도서 리뷰를 쓰기 전에 다른 책을 안 보려고 애쓴다. 봐야 할 책이 쌓여있지만 마음잔을 비우기 전에 다른 책을 읽으면 뭔가 탁해지는 기분. 이 책을 읽었을 때 오롯이 느껴지던 감성이 흐릿 해지는 것 같아. 바로 안 비우고 마냥 가지고 있어도 점점 흐릿해지기는 마찬가지. 위스키는 천사에게 얼마간 나눠주고 나면 점점 농도가 짙어지는데 내 마음잔은 숏폼에 나눠줘서 그런지 농도도 흐릿해진다. 준만큼 물 타기 하는 건가.
2024.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