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지읍 붕어빵 가게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물었다. 숨긴 적도 없는 정체를 한눈에 간파당하고 말았다. 아니, 한귀에 간파당했다고 하는 편이 맞으려나. 붕어빵 하나 달라는 사투리 한 방울 안 섞인 내 요청이 힌트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나는 그곳에서 외지인이었다. 아니, 국토종주를 하는 내내 나는 외지인이었다. 당연한 사실임에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도시에서는 외지인이라는 개념이 흐릿하기 때문일까. 도시에는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가득하다. 나고 자란 곳이, 부모님이 지금 살고 계신 곳이 멀리에 있다는 사실은 놀랄 거리조차 못 된다. 중학생 때 고향을 떠난 이래로 쭉 이방인이었음에도 스스로가 외지인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랬던 내가 이곳에서는 말 한마디로 외지인 판정을 받는다.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나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언어가 이곳에서는 바깥말 취급을 받는다. 그렇다고 들리는 말투를 어정쩡하게 따라 하면서까지 정체를 숨기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어설픈 모방은 내가 외지인이라는 사실을 공고하게 해 줄 뿐이니까.
유창한 경상도 사투리로 잘 가라고 응원해주신 붕어빵집 이모님들
사투리라는 특별한 존재를 나는 아주 좋아하고 아낀다. 내가 나고 자란 동네는 사투리라기엔 서울말 같고 그렇다고 서울말이라기엔 또 사투리 같은 애매한 농도의 방언을 사용했는데, 이 배경에서 주워모은 한 줌의 사투리를 나는 이때까지도 소중하게 간직하며 적극적으로 꺼내 쓰고 있다.
입사 전 신입사원들이 모두 모여 2주간 받았던 연수 때가 생각난다. 전국 10여 개 마이스터고 학생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서울은 물론이요 인천과 경기도,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까지 그 출신이 아주 다양했다. 연수가 시작되던 시점에는 각자 집에서 들고 온 말투를 사용하던 동기들이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너 나 할 것 없이 경상도의 것도 전라도의 것도 아닌 뒤죽박죽 악센트로 대화를 하는데 그걸 듣고 있는 게 퍽 재미있었던 기억이다. 흥미로웠던 건 이렇게 영향을 받은 건 주로 소위 '서울말'을 사용하는 수도권 출신들이고, 원래 색채가 강한 사투리를 썼던 경상도나 전라도 출신들은 마지막까지도 원래 자기 말투를 고수했다는 사실이다.
사투리는 전염성이 강하다. 교본도 룰북도 없고 듀오링고에서도 배울 수 없는 이 독특한 언어들이 이날까지 보존되어 온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구사자들과 오랜 기간 지내는 것 외에는 터득할 방도가 없는 이 개성 있는 언어들을 어찌 좋아하지 않고 배길 수 있단 말인가. 대구말과 부산말은 억양이 다르다는, 심지어는 창원이나 안동 억양도 구분이 가능하다는 사람들을 보며 이 작은 땅에 얼마나 다양한 말이 존재할 수 있는지 체감하고 감탄한다.
국토종주자는 필연적으로 여러 지역을 지나가게 된다. 다음 지역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발걸음을 부단히 수놓아야 하므로, 각각의 구역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미묘한 변화가 느껴질 때마다 아 내가 지금 또 다른 지역에 왔구나, 내 지난한 여정에도 진전이란 것이 있구나, 느끼며 안심하고 힘을 얻곤 했다.
충청도에 진입하면서부터 사투리가 안 들려와 아쉽던 참에 충청도 사투리를 실컷 들려주었던 충주의 무술공원
브런치에 쓰는 글에도 들려오는 사투리를 그대로 옮겨적으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가능하지는 않았다. 기억이 휘발된 탓에 그 정확한 억양과 어휘를 담을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고, 또 한글로 받아 적기 어려운 음소들이 있다는 사실이 아쉬울 때도 많았다.
예를 들면 '여기'의 '여'는 사투리 발음으로 '여'와 '으' 사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 같은, 'ㅡ'를 이중모음으로 쓰면 그나마 비슷할 것 같은 소리를 내는데 현존하는 한글로는 표현이 어렵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실 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 새로 스믈 여듫 짜랄 맹그셨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이 '여+으' 발음은 담을 생각을 아니하셨을까. 한양에는 이 발음을 쓰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날씨가 참 좋던 날 창녕을 걷던 중에
언어에 대한 단상은 이쯤 하고, '시골'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다. 나는 나 자신을 한평생 시골 출신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어릴 적 살던 집 주소는 'xx면 xx 리'였는데,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때쯤 'xx읍'으로 승격되었다. 이제는 주소를 다르게 써야 한다고 설명해 주는 엄마에게 이유를 묻자 '여기 사는 사람들이 늘어서 그래' 하는 답이 돌아왔다. 내 고장이 발전한다는 사실에 작은 마음이 벅차올랐던 기억이다.
나는 동네 논을 뒷동산삼아 뛰어놀며 자랐다. 집 뒤에 난 창문을 내다보면 봄에는 모를 심고 가을에는 벼를 베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농부 아저씨의 땀방울이 담긴' 밥을 남기면 안 된다는 슬로건이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았다. 저녁을 배불리 먹은 날이면 논길을 따라 산책을 나갔다. 어느 방향으로든 조금만 걸어 나가면 과수원이 있어 포도며 감이며 주렁주렁 달려서 익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름이면 앵두나 보리수를 따먹었고 봉숭아를 따다가 찧어서 손톱에 물을 들였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고 고양이가 새끼를 낳는 생명 탄생의 순간에 심심치 않게 참여할 수 있었고 컹컹 짖어서 무섭던 옆집 큰 개가 냄비에 담긴 채로 전달되어 오는 일도 허다했다.
아파트 아닌 곳에서 자란 또래를 찾기가 어려운 90년대생으로서, 스스로가 시골 사람임에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살아왔다. 국토종주를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자란 동네는 매우 번화한 곳 이래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작고 조용한 동네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많았다.
시골은 도시와 다르다. 감각이 그 차이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 탁 트인 풍경과 지저귀는 새소리 그리고 바람에 실려오는 비료 꼬린내와 탄내 같은 것들을 말이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도시에서는 당연하지만 시골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들이 많다. 나는 여러 날 시골길을 누비며 도시에서는 그토록 가치 있었던 돈이 이곳에서는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도시에서는 뭐든지 돈이 있으면 해결할 수 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갈 수만 가지 창의적인 방법을 고안해서 대기하고 있기에, 호출만 하면 각종 서비스를 누릴 수 있다. 돈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자고, 먹고, 쉬고, 놀고, 잘 세탁된 옷을 입고, 손대지 않고도 물건을 이동시키고, 깨끗한 집에서 지낼 수 있다. 도시의 가게들은 장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지도 어플에 정보를 등록해 두고 나를 알아차려 달라고, 나를 찾아와 달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며 사람들을 부른다.
이런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나에게 시골의 생리는 새로운 것이었다. 해가 진 뒤 어두워진 산길 한복판에서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된 지도 어플과 돈이 넉넉한 신용카드는 그저 무력하기만 했다. 모텔도 식당도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에서 기댈 곳이라곤 내 두 눈과 두 발, 그리고 타인의 인심뿐이다.
온라인에서는 오픈 시간과 연락처, 때로는 그 존재까지도 찾아볼 수 없는 가게들이 실제로는 버젓이 장사를 잘하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하며 온라인보다 오프라인 세상이 더 넓을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체감하고 놀랐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난처해할 때 그보다 더 가치 있는 마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건네준 은인들이 있어 무사히 종주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해가 졌는데 잘 곳도 먹을 곳도 없는 난감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수도권에 살다 보면 서울과 큰 도시들의 생태가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시골이야 뭐, KFC 없고 서브웨이 없는 우리 동네 같겠지. 하지만 말했듯 도시와 시골은 다르고, 그 차이는 직접 가서 겪어보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다. 나름 시골에서 자랐다고 생각한 나조차도 별세계를 봤으니,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더욱 새롭지 않을까 한다.
대도시들의 면적보다 더 큰 부분을 수많은 읍과 면과 리들이 메우고 있다. 매일 보는 나의 세계 바깥에는 셀 수 없이 다양한 동네가 있고, 언어가 있으며, 연령대가 있고, 직업이 있다. 작은 땅덩어리 위에 세워진 내 나라를 두 발로 가로지르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세상이 이렇게나 넓구나. 내가 알고 살던 세상은 우물 안에서 올려다보던 동그란 모양의 하늘에 불과했구나.
수안보의 목욕탕을 가득 메운 아주머니 할머니들 사이에서 함께 때를 불리며 나와 다른 연령대의 커뮤니티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 법을 만들고 판결을 내리는 사람들은 이런 면면을 모두 알고 있을까? 산전수전 다 겪고 상경한 자들도 분명 있겠지만, 선거철만 되면 시장에 나가 어색하게 손을 흔드는 정치인들의 사진들을 떠올려 보면 다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삶의 한 면만을 이해하고서 모두를 위해 일하는 것이 가능할까?
정계와 법조계의 입문 조건으로 나 홀로 국토종주가 채택되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해 본다. 그들의 배낭에는 어떤 물건들이 챙겨졌을까? 그들에게 누군가 구간 점프를 제안한다면 그들은 받아들일까? 밤길을 걷다가 숲 속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면 그들도 온갖 무서운 상상을 할까? 책상 앞에 오래 앉아 버티는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오히려 이 끔찍하리만치 긴 여정을 손쉽게 해치워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음을, 그리고 그 모든 면모가 존중받아야 함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