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없이 시리얼을 먹어야 하는 날
울퉁불퉁 고르지 못한 마음들이 아래위 32개의 이들의 저작 운동으로 균일하게 일궈진다. 지금은 어떤 농사도 지을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인 상태이지만 고르고 골라서 새 마음 새 뜻으로 씨를 뿌려야지. 마음의 밭을 갈다 보면 도무지 나아지지 않을 것 같던 일들도 ‘결국 한 줌의 가루’일 뿐인, 고작 이 정도뿐인 인생이다. 시리얼을 먹을 때의 이야기다. 밖은 전쟁터요, 시베리아였다. ‘아프니까 사장이다’라는 소상공인 카페명이 괜히 붙여진 게 아니었다. 초보 자영업자로서 막힐 때마다 방문했던 그 카페에서 나날이 카페명이 내 눈에 선명하게 박혔다. 스스로 더 단단해져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마음을 다져봤지만 조그마한 물살에도 내 마음은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겨우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를 깨달으면서 괜히 옷깃을 고쳐본다.
사람이 동물들보다 꽤나 우월해 보여도 먹는 건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음식이 있다. 음식의 생김새도 사료처럼 생긴 데다가 담는 그릇도 멍멍이들의 밥그릇과 유사하다. 밥과 국은 따로, 반찬은 최대한 많이, 늘어지게 차려 먹는 한국인의 밥상을 보란 듯이 정면으로 반박하는 원푸드 ‘시리얼’. 외국에서는 흔한 아침 식사였던 시리얼이 우리나라에 자리 잡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은 그런 문화적 차이 때문은 아니었을까. 시리얼은 엄연한 식사일까. 간식일까. 과자라기엔 덩치가 너무 크지만, 여전히 과자 코너 모퉁 이에 진열되어 있는 시리얼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남편은 시리얼을 봉지째로 잡고 우걱우걱 먹고 있는 나를 보면서 경악에 섞인 물음을 던졌다. “어떻게 우유 없이 그것만 먹어요?” 시리얼을 대용량 과자로 인식해 왔던 나를 향한 매우 신선한 질문이었다. 대학 자취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접한 시리얼은 다양한 방법으로 즐길 수 있는 과자였다. 시리얼을 살 때는 기본 맛 하나와 아몬드 후레이크가 들어간 맛, 초코 또는 과일 향이 첨가된 맛, 이렇게 두 가지를 산다. 기본 맛은 밥에 해당하고 그 외에 변주한 것은 반찬에 해당한다. 아몬드 후레이크는 건강을 챙기고 싶을 때, 초코는 이 정도 칼로리는 먹어도 되겠다 싶을 때, 과일 향이 첨가된 맛은 앞의 2개를 하도 먹어서 질릴 때 선택한다.
밥과 반찬이 준비됐으면 국을 사야지. 국의 용량은 숏, 톨, 그란데로 나뉜다. 숏은 200ml, 톨은 500ml, 그란데는 1L 다. 나 혼자 시리얼을 먹던 시절에는 숏 2개였지만, 대부분 톨이 무난하다. 대학 기숙사에 살 때는 그릇이 마땅하지 않기도 해서, 우유 팩에 시리얼을 말아서 먹었다. 갓 볶은 원두로 내린 커피가 가장 맛있듯, 시리얼은 막 봉지를 뜯고서 먹는 그 첫 입이 가장 고소하다. 사실상 이 첫 느낌이 얼마나 좋은가에 따라 완봉까지 무난히 간다. 첫 입은 무조건 우유 없이 시리얼만으로 먹어야 한다. 국밥집의 맛을 제대로 알려면 일단 국부터 먹고, 밥을 말아야 하는 것처럼 시리얼의 맛을 제대로 알려면 우유 없이 맨입에 그 맛을 봐야 한다.
김치를 담그는 김치만 계속 먹다가 이건 밥을 부르는 맛이야 싶을 때, 따끈따끈 흰쌀밥을 먹는 것처럼, 시리얼만 먹다가 이건 우유를 부르는 맛이야 싶을 때, 준비한 우유를 뜯는다. 몇 번의 저작 운동으로 입안의 당 수치는 한계치에 도달했을 테고, 침샘 풀가동으로 입안에 수분 기라고는 1도 없이 뻑뻑하다. 이때 사실 물만 먹어도 생명수처럼 달게 먹겠지만, 우유를 먹으면 그 우유의 첫입 또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끝내준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이를 알고 있기에 나는 모든 것이 간절히 우유를 원하고 있을 때, 그제야 우유를 투입한다.
우유도 몇 모금 먹으면 다시 입안은 초기화된다. 시리얼도, 우유도 그 자체로 맛을 충분히 즐 겼으니 마음의 미각이 그 무엇에도 치우치지 않는 불혹의 상태가 되면, 이후에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성숙한 맛을 즐길 수 있다. 시리얼에 말아먹을 때는 짜장 반 짬뽕 반처럼, 기본 맛에 변주한 맛을 조금씩 넣어서 먹는다. 어떤 시리얼을 얼마나 섞느냐에 따라 아몬드 우유가 됐다가, 초코 혹은 딸기 우유가 된다. 보라, 이 얼마나 많은 맛을 즐기고 있는가.
그러니 시리얼의 맛이 거기서 거기라고 얕보지 마라, 이렇게 먹어본 적이 없다면. 시리얼은 다른 과자에 비해 작고 단단한 여러 알들을 끊임없이 가루로 만들어야 하는 데다가, 일반 과자보다 대용량이라서 먹은 티가 많이 나지 않아서 양 조절이 어렵다. 오죽했으면 나는 외출하는 남편에게 남은 시리얼 봉지를 건네며, 당신도 집으로 돌아온 후에 이 시리얼을 먹고 싶다면 시리얼과 나만 집에 남겨두지 말 것을 요청했다. 내가 모르게 숨겨놓으라고 한 적도 있지만, 그러기엔 너무 쉽게 찾아지는 사이즈였다. 300g 완봉에 갈 때쯤이면 턱이 얼얼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오늘도 한 번에 일일 필요열량을 다 채워버렸다. 내일 필요 열량을 당겨와서 다음 끼니에 먹는 ‘셈 칠 것이냐’, ‘말 것이냐’. 오늘도 그것이 문제다. 코를 박고 시리얼을 먹다가 턱이 빠질 때쯤이면, 싱숭생숭했던 마음은 턱 통증에 가려져 이내 희미해진다. 시리얼의 양대산맥 브랜드인 콘프로스트에는 호랑이가, 콘 프라이트에는 사자가 그려져 있다. 그네들은 언제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엄지손가락을 쳐들고 있다. 내가 시리얼을 찾을 때는 뜻대로 되지 않는 내 마음의 밭을 만주 벌판을 점령한 칭기즈칸처럼 완전히 점령하고 싶을 때다. 이런 마음이 스스로 얼마나 유치했는지 알고 있는데, 그런 나에게 왜 계속 최고래. 너 혹시 나에 대한 다 알고 이러는 거야? 겨우 이 정도로 스러지는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