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과자의 계보를 정리하며
고구마의 계절이 돌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최애 간식인 고구마는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맛이 든다. 가을이 되면 그 단맛이 절정에 이르고, 가을에 수확한 고구마를 눈 오는 겨울에 갓 쪄서 먹으면 평생 고구마만 먹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결심이 설 정도다. 그러다가 봄, 여름이 되고 ‘니맛내맛’도 아닌 밍밍한 탄수화물 덩어리가 된다. 제철 음식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대부분의 식재료를 사계절 내내 먹을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도 나는 여전히 오일장에서 자줏빛의 통통한 고구마들을 만날 수 있는 가을을 기다린다. 더운 날 고구마를 사 먹으면, 겉으로 봤을 때는 맛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단맛이 제대로 배어 있지 않아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니다. 게다가 뜨거운 햇살 아래 뜨거운 고구마를 쥐고 있는 것도 고역이고, 땀으로 몸 안의 수분이 사라졌는데 퍽퍽한 고구마마저 입안의 수분을 뺏어가면 난감하기 짝이 없다.
나에게 음식을 먹을 때 포만감을 느끼는 포인트는 목이 얼마나 컥컥 막히느냐에 있다. 그 만족스러운 배부름의 경험을 처음으로 안겨줬던 음식이 고구마였다. 그래서 2006년쯤 혜성처럼 등장한 호박 고구마가 그렇게 큰 인기를 끌었을 때도 나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밤고구마보다 더 달고, 촉촉한 호박고구마는 내가 고구마에게서 느꼈던 매력을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퍽퍽한 밤고구마를 먹으면 즐거운 고민거리가 하나 더 생기는데,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 패를 버리지 못해 밤고구마를 고집한다. ‘오늘은 어떤 음료로 이 퍽퍽함을 타개해 볼까’ 하는 고민이다. 그 옛날 할머니를 따라 동치미, 김치와 같이 먹기도 했지만, 어른이 된 나는 믹스 커피를 고른다. 정량보다 살짝 물을 많이 넣은 믹스 커피다. 달달하지 않은 고구마에 극강의 달달한 믹스 커 피는 화룡점정에 해당한다. 하지만 호박고구마를 먹을 때는 이런 서사가 필요 없으니, 먹는 재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맛있는 거 하나보다 적당히 맛있는 거 두 개를 먹으면 더 만족스러운 식사다.
이렇게 그냥 먹어도 맛있는 고구마를 왜 굳이 과자로 만들었을까. 한동안 나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쌍화탕과 커피를 좋아하는 나에게 누가 이 둘을 합친 ‘쌍화 더치커피’를 선물로 줬는데, 맛만 보고서 한 달째 손대지도 않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고구마도 맛있고, 과자도 맛있다. 그런데 이 두 개를 굳이 왜 조합한 이유는 뭐람. 무엇보다 구황작물계에서 차 떼고 포 떼고 원래 맛으로만 겨뤘을 때는 고구마의 압승인데, 과자판으로 넘어오면 감자에 밀려 고구마의 완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고구마 과자를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과자가 한두 개 정도라면, 감자 과자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종류도 많고 누구나 선호하는 1순위 과 자로 자리매김했다.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고구마 과자는 고구마가 들어가지 않고 모양만 고구마인 ‘고구마형 과자’이다. 어릴 적 같이 살던 할머니가 즐겨 드시던 과자가 소라형 과자, 번데기형 과자와 더불어 고구마형 과자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옛날 과자’, ‘추억의 간식’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 물엿, 설탕, 팜유, 마가린이 주성분으로 한 기름에 튀겨 만든 유탕처리제품이라 먹을 때 강정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일반 과자 용량이 60~70g인데 비해 이런 류는 기본이 100g 이상이라, 과자를 한번 뜯으면 비워야 하는 이들이라면 여간 부담스러운 칼로리가 아니다. 찰 떡 초코파이, 모나카, 전병 등 어르신들 입맛을 저격하는 과자를 꾸준히 출시 중인 청우식품에서 나온 ‘고구마형 과자’의 성분표에 따르면 고구마는 고작 0.2%만 들어갔다. 이마트에서 PB 상품으로 자색 고구마칩을 생산해 내고 있고, 몇 년 전 이 과자를 처음 접했을 때 고구마 애호가로서 몇 통을 즐겼지만 이내 쉽게 물리고 말았다.
반면 감자 과자는 과자에서 가장 중요한 식감에서 합격, 남녀노소 불문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단짠 비율에서 압승이다. 고구마는 그렇게 얇게 썰리지도 않을뿐더러 ‘단’만 가능할 뿐 ‘짠’은 구현해 낼 수 없다. 고구마 과자가 과자업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유는 이런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자 과자로 먼저 성공한 이들이 고구마 버전을 내놓기는 했다. 2001년에 출시된 해태의 구운 감자가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자 2019년 구운 고구마가 나왔지만 이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 1999년 오리온에서 나온 오감자 역시 2021년 오구마를 내놨으나 형보다 ‘너무’ 못한 아우다. 구운, 오가네 형들이 기존 감자 과자들과 식감을 차별화해서 성공 하긴 했는데, 동생으로 나온 고구마 과자는 형들과 똑같은 생김새를 따라 하긴 했지만 맛에 대한 고민은 덜하지 않았나 싶다.
고구마 과자의 조상 격이라 할 수 있는 농심의 ‘깡’ 집안을 들여다보자. 1971년에 태어난 큰형 님 새우깡의 뒤를 이어 1살 차이 연년생으로 출시된 1972년 감자깡, 1973년에 8월 양파깡, 12월에 태어난 고구마깡이 있다. 새우깡이 워낙에 과자계의 넘사벽으로 굳건한 맏형 노릇을 하고 있고, 47년 만에 나온 늦둥이 2020년생 옥수수깡도 나쁘지 않은 반응을 얻을 정도로 안 정적으로 집안이 굴러가고 있다. 깡 시리즈가 다른 과자들에 비해서 원재료를 충실히 재현하려고 한 것에 높은 점수를 준다. 잘 나가는 형들의 인기에 힘입어 선보였던 고구마 동생들의 성적이 변변찮았던 것에 비해 고구마깡이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은 데는 이유가 있다. 이마트 PB 상품인 자색 고구마칩이 감자칩의 식감을 따라 해서 ‘이걸 먹느니 감자칩을 먹고 말지’라는 생각이 들고, 구운 고구마를 아무리 먹어도 ‘은은한 맛을 느껴볼라치면 어느새 다 먹 어버리고 말았다’라는 아쉬움만 남기는 맛이라면 고구마깡은 고구마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살렸다. 고구마에 조청을 묻힌 듯 단맛을 더 극대화하는, 쫀득한 식감에 검정깨 고명까지 올려 서 “내가 마 생긴 게 이렇슴니더, 그래도 잘 봐주이소”라고 수더분하게 웃는 영화의 황정민 같은 매력을 발산한다. 고구마를 쪄 먹지 않는 이라도 이렇게 자신을 솔직하 게 먼저 내보이는 고구마 과자와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으랴.
이례적으로 고구마 과자가 주목받았던 시점도 있었다. 1991년 해태가 일본 과자업계의 원탑인 가루 비사와 기술지원을 맺고 출시한 오사쯔가 그렇다. 출시 당시에는 몇 년 전 허니버터 칩의 열풍처럼 당시 X세대에 도전장을 내밀던 신세대에게 인기 있는 과자였다. 갓 쪄낸 고구마를 먹는 것처럼 포슬포슬한 식감을 재현해 낸 게 먹혔다. 최근에는 오사쯔 맛탕이라는 신상도 나왔는데, 재구매 의사가 없다는 리뷰 일색이다.
우리가 과자를 먹는 이유가 달달함을 위해서만일까? 달달한 게 귀해서, 설탕 한 스푼을 입에 털어 넣으면 족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달달한 것을 손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요즘, 사람들이 찾게 될 맛의 종착지는 자연에서 난 재료의 맛을 잘 살린 맛이 아닐까. 고구마에게 용기 내어 고백해 본다. "고구마야, 있는 그대로의 너는 참 예쁘단다. 뭘 더 하지 않아도 충분해." 감자 과자를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그대로 따라 하려다가 큰 재미를 못 봤던 고구마 과자보다는 생긴 게 뛰어나지 않아도 제 모습에 맞게 자신의 매력을 선보이는 고구마 과자가 훨씬 멋지고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