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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찌 Nov 21. 2022

첫 마라톤의 설렘, 그날의 기록

2022 손기정 평화 마라톤 10K

긴장되는 마라톤 전날


수원 우리 집에서 잠실까지는 대중교통으로 약 1시간 40분. 택배로 온 안내문의 집합 시간은 7시 30분이었지만, 첫 대회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 우왕좌왕할 테니 기왕이면 7시에서 7시 반 사이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거의 5시 첫 차를 타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늦게 일어나면 그날 하루가 엉망진창이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어, 결국 종합운동장 근처에 숙소를 잡기로 했다.


그런데 마침 나에게 달리기의 즐거움과 소중함을 알려준 밑미(meet me)의 달리기 리츄얼 모임에서 대회 전날인 토요일, 서울숲에서 오프라인 모임을 가지자는 공지가 올라왔다. 대회 1~2일 전에는 무리하면 안 된다고들 하지만, 온라인 모임을 3개월 지속하는 동안 처음으로 생긴 오프라인 모임이라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왕 숙소도 잡았으니, 모임 후 바로 숙소로 갈 생각으로 짐을 챙겨 서울숲으로 향했다.


토요일 오전. 모임부터 늦고 싶지 않아서 10분 정도 일찍 나왔는데, 경기 버스의 매직 타임에 더해 지하철까지 빨라 30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다. 밑미홈의 옥상 문을 열고 들어가, 공간에 비치된 감사카드, 긍정카드들을 구경하다 보니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온라인 공간에서 서로의 달리기를 응원하며 쌓아온 내적 친밀감 덕분일까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 마냥 금세 웃고 떠들고 친해지는 게 참 신기했다.


3개월 간 25번의 달리기와는 또 다른 느낌의 '함께 달리기'


가벼운 스트레칭 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인근 서울숲에서 30분 정도 아침 러닝을 했다. 나는 다음날 대회 일정을 고려해 펀런 그룹에 들어갔는데 함께 달린 분들이 내 상황을 배려해주셔서 다 함께 거북이 페이스로 수다를 떨며 가볍게 땀을 내는 정도로 달릴 수 있었다. 러닝 후에는 소소한 수다를 떨며 티타임을 가졌는데, 리츄얼 메이커인 인성님과 치어리더인 시선님이 마라톤 꿀팁들을 마구마구 쏟아내 주시며 응원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내 일처럼 하나하나 신경 써주시는 너무 고마운 분들이다.


그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다 함께 점심과 차까지 같이 마시고 나니 어느새 입실 시간이 다가왔다. 숙소 앞에서 신랑과 만나 짐을 풀고 점심 겸 저녁으로 도가니탕을 든든하게 먹었다. 소화를 할 겸 조금 산보를 했는데도 오후 5시. 더 돌아다니자니 다리에 무리가 될 거 같고, 들어가자니 바로 잠은 안 올 것 같아서, 논알코올 맥주와 구운감자와 빼빼로 과자를 사들고 숙소로 일찌감치 들어갔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시원한 논알코올 맥주를 마시며 예능 2편 정도를 보면서 쉬다가 저녁 10시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움직였던 터라 엄청 빨리 잠에 들었다. 하지만 급 몰려오는 긴장감이 상당했는지, 새벽 3시경에 잠이 한 번 깬 뒤로는 거의 1시간마다 눈이 떠졌다. 그렇게 몇 번을 깨고 자기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에는 알람을 맞춰둔 6시 반이 10분 남았길래 조금이라도 더 자자 눈을 감았다. 그런데 잠시 후. 쎄~한 느낌에 눈을 떴는데 6시 45분?! 알람이 안 울렸다! 알고 보니 알림이 울리는 요일이 월~토로 설정이 되어 있었다. 대회날은 일요일이니 당연히 안 울렸던 거다. (동공지진)


하마터면 여유로운 아침을 위해 숙소까지 잡은 보람이 없어질 뻔했다. 계속 눈이 떠졌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를 느낄 겨를도 없이 다급하게 신랑을 깨우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대회 당일, 설레는 분위기


숙소에서 대회장으로 걸어가는 길. 대회장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잠실 종합운동장 안을 실제로 들어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걱정했었는데, 일제히 한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따라 들어가다 보니 금세 보조경기장을 찾을 수 있었다.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설렘 가득한 웅성웅성거림과 저 멀리 메인 무대 쪽에서 들려오는 타악기 소리가 심장을 쿵쾅쿵쾅 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하는구나 마라톤!


보조경기장을 한 바퀴 돌아 여러 동호회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부러웠다. 혼자 왔으면 외로웠을 것 같은데, 그래도 신랑과 함께라 마음이 든든했다. 보조경기장에서 간단한 준비운동을 하고 신랑과 서로 배 띠와 기록칩을 달아준 다음 주 경기장으로 향했다. 이번 대회는 거의 1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참석했다고 하는데, 대회장 내부가 엄청난 인파로 와글와글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사람들의 얼굴엔 엄청난 설렘과 약간의 긴장감이 섞인 기분 좋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스타트 라인 ~ 3km


준비 운동을 마치고 나니 출발 순서에 맞게 풀, 하프, 10K, 5K 순으로 코스별 대기 장소를 알리는 깃발이 올라갔다. 나는 전날 밑미 모임에서 들었던 조언에 따라 꽤 앞줄에 섰다.

스타트 라인에서 긴장되는 마음으로


최고로 긴장되는 순간이었는데, 순간 어깨 위로 신랑의 손이 올라오는 게 느껴지면서 조금씩 긴장을 풀어갔다. 풀코스, 하프코스가 5분 단위로 출발하고 드디어 10K 출발 시간이 다가왔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5, 4, 3, 2, 1 따앙!


처음에는 모두들 천천히 제자리 뛰기를 하듯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다가, 경기장 밖을 나가는 순간부터 엄청난 사람들이 내 옆을 빠르게 지나간다. 그것도 엄청난 스피드로 쌩쌩.


순간 드는 수많은 생각.

‘나 너무 방해되는 거 같은데 오또카지'
'그 와중에 난 내 페이스 찾아야 하는데'
'초반에 잘 달리는 사람들 페이스에 안 말리려면 워치로 현재 페이스를 체크하면서 달리라고 했는데’


얼마 전에 애플 워치 나이키 앱에서 페이스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어 곧바로 워치를 조작해 변경해뒀다. (달리기 시작 버튼을 누르면 달리는 시간이 기본으로 뜨는데, 이 화면을 한 번씩 가볍게 터치하면 거리나 심박수나 페이스 뷰 모드로 바꿀 수 있다) 분명 사람들을 슉슉 앞으로 보내고 있었고, 비록 '길막'한다고 욕먹더라도 나는 나대로 천천히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워치 화면에 자꾸 6분 초반대가 떠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최근에 아무리 기량이 좋아졌다지만 아무리 빨라도 7분 10초대로 달렸던 게 최고 기록이었던 터라 ‘이러면 나중에 죽어 나갈 거야 넌’ 하면서 계속 감속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3km쯤 가는데도 계속해서 나를 제쳐가는 사람이 많아서 아무래도 너무 앞에 섰나 약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달릴만한걸 보니 또 앞에 서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의 길막으로 인해 추월하는 데 애 먹으셨을 많은 분들께는 너무 죄송하지만 흐윽)


업힐로 시작해 6km


이제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뜨헉' 했다. ‘잠실대교 너… 업힐이었어?’ 엄청 당황했다. 업힐은 상상도 안 했는데… 그래도 여기서부터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 악물고 페이스를 늦추되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진짜 이 악물었다. 앙.


업힐은 다행히 그늘이었는데, 어느 정도 오르막이 끝나가니 이번엔 이제 막 떠오른 햇살이 머리와 등에 따갑게 내리 꽂힌다. 대회 시작하기 전까지 정말 얇은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는데, 그대로 입고 뛸까 하다가 아무래도 더워질 거 같아서 달리기 직전에 벗어서 허리에 묶어 매고 반팔 차림으로 뛰었는데 진짜 잘한 결정이었다. 너무 더워!


5km 반환점을 돌자 물이 있다! 안 그래도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어서 반잔 정도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처음에만 해도 코로 숨을 쉬려 했지만 업힐에서부터 에라 모르겠다 하고 입을 벌리고 숨을 있는 힘껏 들이마시고 내쉬었더니, 입이 바짝 말라버렸던 것 같다. 달릴 때 물 마시면 배 아플 줄 알았는데 괜찮은 거 보니 몸에서 물을 쭉쭉 빨아들이고 있나 보다. (어떤 분들은 입만 헹구고 뱉어내시더라)


잠시 꿀맛 같은 물로 충전한 것도 잠깐, 이때부터 수시로 고비가 찾아왔다. 정면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어서 더운 것도 더운 거였지만 너무 눈이 부셨다. 혹시 몰라 머리 위가 뽕 뚫린 캡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이거 안 썼으면 햇살의 눈부심에 시야 확보도 어렵고, 더워서 흐르는 땀에 눈이 따가웠을 것 같다.

잠실대교를 비추는 해가 쨍쨍


잠실대교 다운힐에 진입할 때가 되니 다시 롯데타워가 만들어주는 그늘이 생겼는데, 덕분에 한결 편하게 달릴 수 있었다. 그러자 어렴풋이 들리는 '파이팅' 소리. 여러 크루의 응원단들의 응원 소리도 있었지만, 오전 볼일을 보러 나오신 듯한 동네 주민 어르신 한 분이 큰 소리로 '파이팅'을 외쳐주시는데 그게 어찌나 큰 힘이 되던지, 괜히 울컥했다.


이제 끝이 보이는 거리 7km


그렇게 조금 더 달리니 드디어 7km, 파워에이드 한 잔이 제공되고 있었다. 이온음료 별로 안 좋아하는데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파워에이드를 마신 것만 같았다. 파워에이드 덕분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7km 고비를 넘기자 약간 아무 생각 없이 더 잘 달리게 됐다. 힘들게 계속 운동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걸 초월하는 순간이 온다더니 오늘 나한테는 그게 7km 인가 싶었다.


얼마 전에 처음으로 아침 러닝으로 7km를 목표로 하고 달렸을 때 약 4km쯤부터 한계가 느껴졌고, 그때 시선을 똑바로 하고, 허리를 펴고, 발 롤링을 하나하나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남은 3km를 버티는 데 큰 도움이 됐었는데, 이번에도 그 방법을 쓰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막판에 더 안정적으로 달린 것 같다.


대회 2주 전, 마라톤 경험이 있는 친구가 대회 시간과 유사한 아침 시간에 달려보라고 했던 조언과, 밑미 모임에서 적어도 7km 까지는 뛰어보고 나가면 나머지 거리는 대회뽕(?)으로 달릴 수 있다고 해주셨던 조언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피니시 라인까지 마지막 전속력


그리고 마지막 종합운동장 주경기장 트랙으로 들어가는 내리막에서 힘을 받아 피니시라인까지 100m 정도를 거의 전속력으로 달렸다. '나에게 아직 힘이 남아 있었네?' 하는 느낌과 '이렇게 전속력으로 뛰어본 게 언제더라' 내가 알고 있던 내가 아닌 것 같은 생경한 느낌이었다. 나중에 기록을 보니까 그 구간을 4분 24초 페이스로 내달리며 골인했더라. 진짜 모든 힘을 쥐어 짜내고 나니까 말 그대로 주저앉게 됐다.


그렇게 앉아서 숨을 고르는 동안 완주 기록을 알리는 문자가 도착했다.

1시간 9분?!?!?! 예상했던 기록보다 11분이나 일찍 들어왔다!!! 말도 안 돼!!!! 해냈다!!!!!!!




오늘의 이 감정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래 난 오늘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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