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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찌 Aug 01. 2021

발리의 새벽은 길다 (2) - 노숙위기

호스트는 어디에

발리 공항에서 우붓까지 가는 길은 매우 한산했고, 그래서인지 예상시간보다 30분 빠른 2시 반에 숙소 앞에 도착했다. 숙소는 
에어비앤비에서 소개한 것처럼 번화가에 위치하긴 했지만, 입구는 차가 들어가기는 어려운 좁은 골목 안쪽에 위치해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결국 큰 도로에서 짐을 내려 드라이버는 보내고 나 혼자 짐을 끌고 숙소로 들어갔다.

어둡지만 구석구석 은은하게 조명이 설치된 정원을 거쳐 프런트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지만, 호스트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불안했지만 호스트와 약속했던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으니 기다려보기로 했다.


하지만 호스트는 3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슬슬 연락을 해봐야겠다 싶어 클룩 드라이버에게 받았던 유심(USIM)을 꺼냈는데... 그 순간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유심 교체 핀이 없다...


한동안 머릿속 회로가 모두 끊긴 것처럼 멍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가방 속을 헤집어봤지만, 핀을 대체할만한 뾰족한 물건은 없었다. 예의가 아닌줄은 알지만, 숙소 프런트 데스크 구석구석을 뒤졌다. (애초에 약속한 시간에 나왔으면 이럴 일도 없었..) 혹시나 있을까 기대했던 클립은 보이지 않았고, 볼펜이나 샤프같이 일단 뾰족해보이는 거라면 무조건 다 꺼내와 유심 핀 구멍에 대어봤지만 턱도 없었다. 


벌써 3시반...

프런트 뒤쪽으로 보이는 방문을 두들겨볼까도 싶었지만, 혹시나 다른 투숙객이 묵는 방이면 어쩌나 싶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정말 말 그대로 발을 동동 굴러댔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목이 슬슬 말라왔다.


"아 목말라... 물이나...아아아아아아아! 편의점!"


순간 택시를 타고 오는 길에 봤던 24시 편의점이 떠올랐다. 보통 관광지 편의점에선 유심을 팔기 마련이고, 그럼 유심 핀이 있을 가능성도 높으니까! 후다닥 뛰어나가보니, 다행히 근방에 꽤 큰 편의점이 하나 있었고, 더 다행히도 편의점 직원에겐 유심 핀이 있었다. 유심을 교체해준 감사의 표시(?)로 간단한 물과 요깃거리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남겼지만, 묵묵부답. 아까 같으면 예의가 아니진 않을까 한참을 고민하며 답장을 기다렸겠지만, 이미 한 시간 넘게 기다려 제대로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더 고민할 것 없이 바로 전화 버튼을 눌렀다. 정말 쿨쿨 잠을 자고 있던 호스트는 3번의 시도 끝에 전화를 받았고, 나는 아주 제대로 컴플레인을 하리라 마음을 먹으며, 프런트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잠시 후 프런트 뒤쪽 문에서 호스트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까 문을 두드릴걸...) 

잠결에도 세상 해맑은 표정으로 걸어오는 호스트. 


이게 참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되기는 한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분명 방금 전까지 머리끝까지 나있던 화가 호스트의 미소 한방에 쑤욱 들어갔다. ‘하긴 엄밀히 따지면 한참 잘 시간에 도착한 내 잘못이지’ 하는 생각까지도 들고... 허허허


호스트는 살인 미소 한 방 날려주고는 내 무거운 캐리어를 번쩍 들어 3층 방까지 올라갔다. 나도 컴플레인은 잠시 넣어두기로 하고, 호스트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그냥 이제 진짜 발리에 도착했다는 느낌 때문에 모든 게 너그러워졌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자를 구원하는 친절한 도움의 손길들


거의 반나절을 비행기 안에서 구겨져 있던 몸을 스트레칭으로 펴내고, 간단히 샤워를 한 뒤 침대에 누웠다. 시간은 새벽 4시 반. 발리 도착하고 숙소까지 오는 고작 4시간 동안, 크고 작은 도움을 3번이나 받았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밤은 정말 노숙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환승하는 공항에서 읽었던 책 구절이 생각났다.


"하나, 나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에게서 너무도 많은 도움을 받아왔어. 이제 내가 너에게 그 친절을 돌려주는거야. 그러니 하나, 너도 여행을 하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네가 받은 친절을 그 사람에게 돌려줘."
- 김하나의 '힘 빼기의 기술' 중 -


근데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줬던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안 나는건지, 정말 도움을 준 적이 없었던 건지, 막상 떠올리려 하니 도통 생각은 안 난다. (뭐 하나쯤은 있겠지) 아마 도와주는 사람은 대개 별 의미없이 스치듯 도와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나가는 사소한 친절이 받는 사람에게 엄청난 도움으로 와닿은 것일지도. 

오늘 받은 친절을 꼭 누군가에게 돌려주겠다고 다짐하며, 포근한 이불을 얼굴 끝까지 덮는다.


그나저나 이제는 '진짜로' 새벽 도착 비행기는 그만 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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