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대기실과 헬퍼는 사양합니다

제 자유의지로 돌아다니겠어요

by 날찌

언젠가 주말에 플랜팅 수업이 있어 압구정을 방문했는데, 정장차림에 본인 몸만한 짐보따리를 2개씩 이고지고 총총총 걸어다니시는 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결혼식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1초만에 알아볼 수 있다. 바로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도와주시는 헬퍼 이모님. (왜 이모님이 붙는지는 잘 모르겠다. 근데 그냥 헬퍼라고 하면 예의없어 보이는 요상한 기분에 일단 이모님을 붙여본다.)


헬퍼 없는 결혼식


결혼 전 나의 지인들은 한결같이 "헬퍼없는 결혼식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해줬다. 도대체 왜?


가장 큰 이유는 드레스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드레스가 꽤 무겁기 때문에 샵에서 드레스를 가져오고 반납하는 과정 자체가 매우 번거로운데 이 역할을 대신 해주시기도 하고, 드레스를 입고 이동하는 중에 잘못 밟아 찢어지거나, 이물질이 묻어 상하는 일이 생기는 걸 사전에 막기위해 옆에서 꼼꼼히 체크하고 관리해주고, 본식을 마무리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에도 옷매무새를 만져주신다. 그래서 본식이 끝난 뒤, 헬퍼가 필요한 거대한 드레스에서 편한 옷(혹은 한복)으로 갈아입는 거라며.


그런 이유라면 거대하고 무거운 드레스를 안 입으면 그만 아닌가? 드레스 하나로 인해 움직임의 제약이 생기고, 그로 인해 내 결혼식에 찾아온 손님을 내가 버선발로 나가 마중하지는 못할 망정 신부대기실에 다소곳이 앉아 있어야 하는 꼴이라니.


신부대기실은 금남의 구역이 아닌데


사실 그 전부터 내가 신부대기실을 절대 만들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계기가 있었다. 친한 직장 동료의 결혼식이었는데 남자 동료의 대부분이 신부대기실을 들어가지 못하고 쭈뼛대는 모습을 봤을 때다. 그들의 고충(?)을 들어보니 신부대기실은 너무 여자들만을 위한 공간 같아서 들어가기가 항상 민망하더라고.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스크린샷 2021-07-22 오전 9.46.56.png 흔한 남자 하객들의 고민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신부대기실과 헬퍼 이모님의 도움없는 결혼식을 치러보기로 결심했다.


거대하지도 볼품없지도 않은 드레스를 찾아서


그런데 헬퍼 이모님 없이도 움직이기 편하면서 너무 없어보이지 않는 드레스를 고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처음엔 인터넷으로 무릎까지 오는 10만원 짜리 미니 드레스도 구매 해봤는데 이건 너무 볼품없더라. 나름 스몰웨딩 전용 드레스 혹은 피로연 드레스를 대여해주는 곳들을 찾았지만 작고 통통한 나의 체형에 딱 맞는 드레스는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웨딩플래너를 끼고 드레스투어를 가면 3곳 정도를 들른다고 했던 거 같은데, 내가 원하는 드레스를 찾으려면 그걸로는 택도 없었다. 결국 결혼식 2주 전까지 드레스를 준비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그냥 포기하고 아무거나 입어야 하나 싶은 찰나, 정말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기적같이 내 마음에 쏙 드는 드레스를 찾았다. (너무 예쁜 디자인이 많았던 포마이시스)


나름 웨딩드레스 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바닥에 딱 끌리는 정도의 드레스였는데, 한 손으로 치마를 들고도 혼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기장이어서, 나는 그 날 그 누구보다 결혼식장을 힘차게 돌아다닌 신부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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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6색의 하객맞이 풍경


마당발 신부


신부대기실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하객을 맞이하는 부모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두 사람과 각자의 부모님까지 총 6명이 입구에 서 있다보니, 나와 부모님의 하객 뿐만 아니라 신랑 쪽 하객들과 인사하기도 굉장히 편했는데, 우리 두 사람 모두 각자의 친척분들과도 사전에 얼굴을 뵀던터라 신랑의 친척분을 신랑이 아닌 내가 직접 부모님께 소개시켜드리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나, 남자 하객분들이 매우 좋아했다. 신부대기실이었으면 아마 안 들어가고 말았을거라며. 부모님의 손님과 나의 손님을 서로에게 소개할 수 있었던 것도 너무 좋았다. 나의 오랜 직장 동료, 어릴 때의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친척 어르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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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하객을 먼저 붙잡고, 하이파이브를 하고, 부모님께 인사도 드리고


신부대기실 없애는 대신 포토존을 따로 마련했는데, 나름 반응이 좋았던 것 같다. 신랑과 나 누구 할 것 없이 손님이 원하면 포토존으로 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래 신부만 손님과 사진을 찍으라는 법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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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대기실이 아니라 더 자유롭게 누구나 사용한 포토존


이렇게 헬퍼 이모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부산스럽게 움직일 필요도 없고, 예식 전후로 옷을 갈아입기 위한 시간을 따로 낼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하객분들과 인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반가운 사람, 보고 싶었던 사람, 처음 뵙는 분 모두에게 감사함을 전달하며.




"내 커뮤니티의 반경이 넓어지는 것"


이런 게 부부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가족이 우리의 가족이 되고, 나의 친구가 우리의 친구가 되는. 우리의 결혼식은 이렇게 서로의 커뮤니티 반경을 넓혀주는 좋은 스타트가 되어준 자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직도 헬퍼 이모님 없는 결혼식이 상상이 안되고 도전하기 꺼려지는가? 이렇게 좋은 점이 많은데?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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