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예찬
저는 요즘 바쁘게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마음을 다잡고 일을 하다 보니 종종 몰입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제가 느끼는 몰입상태는 주변의 소음이 저 뒤로 물러나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생각이 온통 모아져 있는 상태입니다. 평소 보다 질이 좋은 몰입이 찾아오면 평온하고 집중된 상태로 일을 할 수 있어서 매우 좋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아침 일찍 남산에 가기로 한 것은 딱 한 줄의 톡 때문이었습니다.
언니 보고 싶다 ㅜㅜ
보고 싶다는 말 뒤에 붙은 ㅜㅜ가 H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합니다. 저는 새벽 2시 가까이 까지 급한 일을 하고 6시 20분쯤 일어나 준비한 후 약속한 곳으로 나갔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기온이 뚝 떨어진 거리를 걸으며 저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면 입가에 맴도는 시 한 편이 있습니다.
방문객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정현종詩-
오랜만에 만난 H는 그간 어떻게 지내왔는지를 확연하게 짐작하게 해주는 깡마른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저를 만나서 반가운 마음이 피곤해 보이지만 반짝이는 눈동자 안에 가득합니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남산둘레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눕니다. 용케도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고 있는 H가 조금씩 단단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어 저는 마음속으로 안도하고 지난날 견디고 살아낸 시간에 대해 격려의 말을 건넵니다. 어깨를 간간히 토닥여줍니다.
"씩씩하게 잘 살아가고 있어 다행이야."
약간 쌀쌀해진 날씨였지만 바람이 그리 차지 않아 좋았습니다. 한 참 걸어 올라갑니다. 남산엔 왜 그리 계단이 많을까요? 헉헉 숨이 차고 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힙니다.
우리는 숨을 고르며 그간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합니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서로의 보폭에 발걸음을 맞추며 걸어갑니다. 오늘 서울은 미세먼지 매우 나쁨이라 하늘이 온통 뿌옇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야기를 나눌수록 마음은 더 맑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게 무슨 나무의 싹일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새싹이 작은데 나는 한눈에 보인다."
"신기하네, 정말."
"좋아하면 아무리 작아도 잘 보여."
우리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제일 먼저 싹이 돋아나고 있는 나무를 살펴보았습니다.
남산타워에서 조금 쉬었다 가기로 하여 H는 라떼를 저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주문하였습니다. 이곳엔 남산의 전경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편안한 좌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차를 마시면 비 오는 날이나 눈 내리는 날, 초록이 우거진 여름이나 연두잎 싹트는 봄에도 풍경이 천의 얼굴로 마음을 보듬어 줄 것 같습니다.
"어머 개나리가 피었네."
지나가던 사람이 길가에 노랗게 피어난 꽃을 보며 말했습니다.
"이 꽃 뭔지 알아?"
"개나리 같아 보이는데."
"이거 개나리 아니야. 영춘화(迎春花)야."
"영춘화 첨 들어본다."
"봄을 맞이하는 꽃이라는 뜻 이래."
"영춘화는 꽃잎이 5~6개이고 꽃잎이 활짝 벌어지지만, 개나리는 만개 시에도 꽃잎이 활짝 벌어지지 않는대."
예전에 신촌에 있는 여대에서 춘계 학술대회가 열릴 때 학회에 참여한 사람들과 학교 학생들이 교정에 만개한 영춘화에 매달려 사진을 찍어대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 저는 함께 갔던 학우에게 말했습니다.
"학회 보다 영춘화가 훨씬 강렬하다."
겨울의 찬바람을 이기고 찬란하게 피어난 영춘화를 한 참 바라봅니다. 바람이 아직 좀 차지만 햇볕이 비추니 그 온기가 바람의 냉기를 금세 거둡니다.
우리는 인생의 길 위에서 힘들고 고단하고 때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픈 마음이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힘듦을 이겨내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낸다면 우리는 잘 담금질된 검처럼 더욱 예리하고 튼튼한 진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