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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Jul 09. 2021

자급자족하는 땜빵도사

결핍은 감사를 부른다.



남아공에 올 때 고민했던 문제 한가지는 머리 손질이었다. 우리 집은 남자 셋, 빨리 자라는 머리카락 탓에 깔끔한 머리가 보기에도 좋아 주기적으로 미용실에 찾았었다. 세 명이 주기적으로 미용실만 찾아도 들어가는 비용이 꽤 부담스러웠다. 그래봤자 여자 머리 손질을 미용실에서 1회 하는 것보다 저렴하겠지만, 남아공에서는 그것조차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리 단장은 고사하고, 남편과 아이들 머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스러웠다. 머리야 장발이 되어도 누가 뭐라 할 사람 하나 없지만, 그 당시 고민거리였다. 한국에서도 내 맘에 맞는 미용실 찾아 삼만리였는데, 외국 미용실에서 내 머리를 맡긴다는 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남아공에 오면 직접 아이들 머리며, 남편 머리는 내가 책임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짐을 꾸릴 때 미용 도구를 챙겼다. 미용 공부를 잠시 했던 사촌 남동생에게 가위와 바리깡 및 몇 가지 도구를 얻었다. 쿠팡에서 헤어 클리퍼라고 나와 있는 제품을 하나 주문했다. 남아공으로 오기 전 온 가족이 미용실에 가서 최후의 단장을 받았다. 약 두 달이 지나자 깔끔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남아공에는 미용실이 많다. 바버샵이라는 남성 전용 미용실, 일반 여성 전문 미용실, 흑인 전문 미용실도 따로 있다. 남아공은 가발 사업이 매우 활발히 이루어지는 나라다. 그만큼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흑인은 머리를 짧게 밀거나, 대부분 실로 땋은 가발을 쓴다. 머리가 두피 속으로 파고들면서 자라기 때문에 머리가 곱슬하게 말려있다. 언젠가 흑인이 머리를 땋는 모습을 봤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어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의 속도였다. 보통 흑인들이 머리를 땋거나, 가발을 하러 미용실에 가면 하루 6시간까지도 앉아 있는 일도 있다고 현지인에게 들었다. 한 가지 더 얻은 정보는 현지 미용사들은 동양인의 머리카락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인, 흑인, 동양인의 모질이 각기 다른데, 동양인의 모질이 정전기가 잘나서 들러붙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는 미용실은 가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실제로 백인 미용사가 인도인 머리는 깎지 않겠다고 해서 인종차별 문제로 신고가 들어간 예도 있었다. 그 미용실은 그 미용사의 인종차별 태도 논란으로 벌금을 받았고, 그 이후로부터 매달 소정의 벌금을 국가에 낸다고 했다.      

유튜브를 찾았다. 셀프 헤어컷, 엄마표 헤어컷, 바리깡 사용법 등의 카테고리로 검색을 했다. 수많은 콘텐츠가 나왔고, 가장 쉬운 방법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집에서 내 머리를 잘라줬던 경험도 있었고, 스스로 앞머리도 잘라봤다. 신문지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쏙 넣고, 세면대 위에 쓰레기통을 놓는다. 거울 앞에서 서서 앞머리를 가운데로 모아 잡고 코앞으로 잡아끌어 놓는다. 그럼 눈이 사팔뜨기가 되면서 쥐가 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짤뚱하니 말려 올라간 앞머리를 보면 눈물이 찔끔 났고, 성공하면 쾌재를 불렀던 날도 있었다.      

남아공에 와서 남편 머리와 아이 머리를 깎던 첫날, 망치면 어쩌나 걱정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느릿느릿 땜빵 날까 두려워 더듬거리면서 머리를 깎았다. 둘째 머리는 땜빵이 났고, 남편은 호섭이가 되었다. 스스로 위안이었겠지만, 셋째는 아직 아기니까 망쳐도 귀엽게 보였다. 어디 나가서 잘 보일 곳도 없으니 괜찮다는 남편과 착한 둘째 엘이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며 나를 위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첫째 별이가 5세 무렵, 연년생 동생인 엘이의 머리를 가위로 듬성듬성 잘라놓은 일이 기억났다. 

교회 대청소 날, 사택 청소를 스스로 해보겠다며 1층에서 3층까지의 계단 물청소를 하던 날이었다. 아이 둘은 집에 두고, 계단 청소를 마치고 들어오던 그때, 현관에 놓은 쓰레기통에서부터 방문 앞까지 머리카락 뭉치가 듬성듬성 바닥에 놓여있었다. 헨젤과 그레텔이 숲에서 빵 조각을 주웠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머리카락의 길을 따라 방으로 향했을 때 엘이는 앉아서 해맑게 웃고 있었고, 별이는 손 뒤로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다. 동생 머리를 잘라놨다고 잔소릴 한바탕 퍼부으면서도 웃음이 났던 그 순간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아이와 나는 다르지 않은가!

미용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한국에 나가면 커트 기술이라도 어디 가서 배워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5월경, 한국에서 엄마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가 아는 미용실 원장님이 있는데, 너 얘기 했더니, 한국 나오면 꼭 오래. 미용기술 가르쳐 준다고.!”      

시기적절한 엄마의 말에 신이 났다. 어쩜 내 필요를 이렇게도 잘 아시는지 감사가 절로 나왔다. 그해 11월, 비자 문제로 한국에 방문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꼭 가겠노라 마음먹었다. 한국에 갔던 6주 동안 모든 일정을 소화하면서 미용 배우는 시간을 꼭 확인했다. 미용실 원장님은 기독교인인데 선교사를 돕겠노라며 무료로 기술을 알려주었다. 커트만 배우려고 갔는데, 커트뿐만 아니라 파마까지 알려주고, 매일 연습하라며 숙제도 내주었다. 게다가 대회에서 받은 가위까지 선물로 주었다. 연습할 가발도 구매하고, 필요한 부자재들을 구매했다. 집에서 시간이 될 때마다 연습했지만, 6주의 시간은 모든 기술을 배우기엔 너무 짧았다. 배워온 기술로 남아공에 와서 우리 가족의 머리는 물론 한국 지인 S의 전담 미용사가 되었다. 물론 지금은 처음보다 능숙해졌고, 남편도 아이들도 만족해한다. 가끔은 여전히 땜빵이 나기도 한다.      

미용기술을 배워서 오면서 한국 지인들뿐 아니라, 흑인을 제외한 다른 인종들의 머리를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근본 없는 자신감과 부푼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겁이 났고, 우리 가족 머리나 잘 하자였다. 그래도 나를 믿고 때마다 찾아와서 머리를 맡기는 S의 머리 커트와 파마를 3년간 해주고 있다. 머리 값을 받지 않자 때마다 케이크며, 먹을 것을 들고 오곤 한다. 그럼 차 한잔 내와서 같이 곁들이며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갖는다.     

기회를 만드는 일, 스스로 기회를 찾아서 필요를 해결하는 일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의도되지 않은 시기적절한 만남과 도움은 언제나 감사를 부른다. 짧은 한국행의 시간 속에서 알차게 재능을 기부받을 수 있었던 시간과 만남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가끔 이지만 안부를 묻고 기도를 요청하기도 하고, 삶을 나눈다. 


완벽하지 않아도 자급자족하는 삶, 그 삶 속에서 잦은 실수와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삶,

그런 삶에서 부어주시는 은혜와 함께함은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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