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로 산다는 건
딸의 운동화를 신었다. 이제 내 작아진 옷, 신발을 별이가 입을 게 아니라 별이의 작아진 옷과 신발을 내가 입을 때가 온다. 옷은 아직 내가 더 크게 입지만, 발은 쑥쑥 자라 나보다 커졌다.
우리 집에서 가장 작은 사람은 반드시 나여야만 해!
어렸을 때부터 반에서는 키가 작아 늘 1번이었다. 덕분에 앞자리에 앉았고, 친구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귀여움이라 적었지만, 놀림도 많이 받았다. 정말 많이. 수많은 별명이 붙었고 놀림에는 '귀여워서 그렇지'라는 말이 따라붙었지만 썩 유쾌하지 못했다. 키가 작다는 건 콤플렉스였다. 지금도 딱! 5센티미터만 자랐으면 좋겠다는 소원은 여전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WISH 말이다. 뼈를 늘이는 수술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다. 다행히 하이힐이 있어 소원 성취 할 수 있다지만 나이를 먹어가니 하이힐보다는 로퍼가 좋고, 운동화가 좋다. 왜 엄마가 어렸을 적에 치마를 자주 안 입었는지, 뾰족구두대신에 뭉뚱 한 굽을 신었는지 아이를 낳고 나이가 먹어가면서 이해가 된다. 엄마는 왜 밥을 급하게 서서 먹었는지, 가끔은 흘리면서 먹는다며 가자미눈으로 왜 그렇게 먹냐며 핀잔을 줬는데 늘 여유 없이 밥 벌이하느라 후다닥 일생을 살 수밖에 없던 거다. 아무튼, 나는 엄마가 된 지 14년이 되었고 세월이 지날수록 엄마를 이해한다. 내 모습에서 엄마를 본다. 엄마는 나보다 덩치도 크고, 키도 크다. 덕분에 내가 입던 옷을 엄마가 입는다는 건 상상해 보질 않았다.
이건 자랑 섞인 볼멘소리다. 부모로서 자녀가 쑥쑥 성장하는 건 매우 기쁜 일이다. 특히나 키가 자라는 게 눈으로 보이는 건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극도의 성장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내 아이는 언제 자라서 내 키를 넘기나 했는데 별이가 곧 넘으려 한다. 한편으론 기분이 묘하고, 다른 마음으로는 성장판 닫히기 전에 얼른 커서 나를 엎고 다닐 수 있을 만큼의 키가 되었으면 좋겠다. 급 성장기가 아직 몇 년은 더 남은 다엘이도 요엘이도.
딸이 신던 운동화를 빨아뒀었다. 6개월은 안 신은 신발이다. 미리 세탁해 뒀었다. 오늘 아침 나서면서 그 신발을 꺼내 신고 하루를 보냈다. 그냥 운동화를 신었을 뿐이데 종일 자꾸 시선이 운동화로 향했다. 그리고 촉감을 느꼈다.
그제야 전에 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신발이 작은지만 체크하고 괜찮네 뭘! 하며 그냥 넘겼는데 내게 호소했던 말이 어떤 건지 너무 늦게 알았다. 이래서 역지사지는 제대로 느껴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인가 보다 했다. 급 미안한 마음이 몰려왔다. 다행히 오래 신지 못하고 다른 신발로 바꿔서 신겼지만, 그 몇 달 동안 이 신발을 신을 때마다 느꼈을 발가락의 아릿함을 직접 느끼고 나니 미안함은 배로 커졌다.
어제는 막내 엘이와 산에 하이킹을 갔다. 산에 가는데 한참 걷다 보니 녀석이 바닥이 미끄러운 운동화를 신고 나온 거다. 눈에 신발이 들어오는 순간 속상한 마음과 걱정이 밀려왔다.
'저러다 미끄러지면 다칠 텐데, 다른 신발 두고 왜 저 신발을 신고 나왔나' 혼잣말을 하면서 멀지 감치에서 아이가 폴짝 거리며 한시도 가만 걷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찍찍이도 한계가 됐는지 잘 붙지도 않고, 운동화를 빨아서 햇볕에 말렸더니 아프리카의 타버릴 듯한 태양이 신발을 다 망가뜨려놨다. 심지어 운동화 줄은 늘어나서 너덜너덜해졌다.
남편이 옆에서 속을 건드렸다.
그냥 더 뾰로통해진 건 아이가 무슨 신발을 신고 나와는 지도 세심하게 살피지 못한 내가 뭐 했나 싶은 마음에 스스로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던 거다.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아이들이 크는 모습을 보면 늘 만감이 교차한다.
부모로서, 늘 고민이 된다. 어디까지 아이들을 간섭해야 하고 가이드해줘야 하는지,
무엇보다 아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결정과 행동에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는 잘 살펴주고 싶다.
바람과는 다르게 바쁜 엄마를 보면서 일할 때는 알아서 문 닫아주고, 먹을 것까지 챙겨다 주는 착한 녀석들 마음에는 '엄마는 보살펴 줘야 하는 존재'라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 40 먹도록 딸 걱정 밖에 모르는 엄마, 아빠의 보살핌을 받고, 세 꼬맹이들의 보살핌까지 받고 있으니 행복에 겨워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내가 더 잘할 테니,
나중에 너희 셋 모두 내 키를 훌쩍 넘겨 나를 업고 다녀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