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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Jun 14. 2023

너와 나의 1년, 우리의 14년

마음가짐이 필요 없는 일.




14주년.

결혼기념일이다. 동고동락한 지 14년이 흘렀다니. 세월을 누가 훔쳐간 것만 같다. 내 주름이 지나온 길.


결혼하기 3년 전, 남편과 만났을 땐 이 사람과 결혼하게 될 거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스치듯 지나가고, 3년 후 다시 만났을 땐 이제 사귀면 무조건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6개월을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다. 그리고 결혼했다.


매년 돌아오는 기념일.

특별한 이벤트는 없다. 그저 함께 좋아하는 음식 먹고, 꽃다발받으며 나랑 살아줘서 고맙다는 남편의 식상하지만 진심인 멘트가 전부다. 나도 뭔가 해줘야 싶은데 늘 자긴 필요 없단다. 사실해줄 것도 없다.

서로의 마음을 알기에 닭살스럽지만 사랑이 아니면 어디 같이 살까 싶다.

만에 안 드는 부분 투성이고, 때론 꼴도 보기 싫을 때도 많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내 사람이니 그저 맞추며 산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라는 김창옥 강사의 말이 머리에서 종종 웅웅 울린다.


어제 전기가 나가 춥게 잔 탓에 아침부터 컨디션이 별로다. 눈을 빠질 거 같고 몸은 으슬거린다.

"아침 드시러 오실래요?'

가끔 아침에 잘 차려진 한식을 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솜씨 좋은 미경사모님 덕에 포식한다. 결혼기념일인지 모르고 불렀는데 마치 축하대접을 받는 기분에 아침부터 귀한 감자탕을 한 그릇 해치웠다. 게다가 키즈 프로그램 때문에 오후에 다시 만났을 땐 예쁘고 비싼 장미꽃 한 다발을 턱 안겨주셨다.

"결혼기념일 축하해요!"

센스 만점 사모님 덕분에 기분이 활짝 폈다.

아이들 픽업하러 가서 학교 앞에서 대기 중에 별이와 친구들이 나온다.

"엄마! 애들이 할 말 있대요!"

"응?"

"Happy Anniversary!!"

"Wow. Thank you!"

다들 자기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인데 그렇게 축하해 준다. 해맑게 웃으면서.

말 한마디에 천냥빚을 갚는다는데, 되려 천냥 빚을 진 기분이다. 이런 관계는 다음에 나도 더 잘 챙겨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예계에 최수종을 비롯한 여러 애처가가 있다. 최근 배우 진태현이 아내 박시은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모습이 방송을 탔다. 그것도 여러 차례. 그저 그들의 일상을 담은 이야기인데 행동 하나하나에서 진태현이 자기 방식대로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진하게 느껴졌다. 계속되는 아이 유산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오는 아내를 보면서 진태현은 어떻게든 아내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애썼다. 안타까움, 슬픔, 원망 그리고 그 캄캄하고 짙은 터널에서 다시 피어오르는 기대감과 반짝거리는 '사랑'. 다시 밝은 얼굴로 티브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희망과 사랑이 가득 느껴졌다. 이제는 진태현, 박시은 이름만 들어도 이 부부는 대단한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는구나 생각 든다.


진태현이 한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고 대답했다.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가짐이요? 아내를 사랑하는데 마음이 필요하다고요? 미안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진태현 말은 아내를 사랑하는데 마음가짐은 필요 없다는 거다. 그냥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말이다. 듣고 보니 반기를 들 사람도 있을 것 같지만, 어느 정도 동의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마음가짐이 필요하고, 억지로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한들, 그 사랑이 자연스러울까 싶다.




부부와 가족이 억지로 사랑하고 억지로 이해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면 피곤할 거다. 물론 이해와 노력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게 지속되지 못하거나 서로의 힘을 소진하게 만드는 순간이 많아지면 갈라서는 일이 생기는 거라고 본다.


남편을 만나 1년 동안 신혼을 즐겼다. 1년 후 생긴 별이, 그 뒤로 다엘, 요엘과 함께 우리는 14년을 함께 보냈다. 기억과 기록이 공존하는 시간 속에 행복한 순간만 있지 않았다. 힘들고 지겹고 도망가고 싶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내가 지지리 궁상 못나게 느껴지는 순간도 많았다. 그러나 나의 지난 14년의 시간은 지금의 내가 있게 만들어 준 시간이다. 그 시간이 어떠했든 힘들었을지라도 지나고 나면 '그래. 맞아 그땐 그랬지' 하고 말할 수 있는 켜켜이 쌓인 기록말이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았다. 인생 왔다가 가는 순서 아무도 모른다지만,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아웅다웅 살아가려면 14년보다 2~3배는 더 살아야 된다. 때론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 마음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선한 마음을 다스리면서, 그러나 내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에는 마음가짐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이미 내가 품었다는 건 사랑이라는 것이기에.


맛있는 거 먹으면 생각나고, 기념일엔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축해주는 남도 있는데, 내 가족을 사랑하는데 노력이나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사랑하고 품으면 된다.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평범하지만 특별한 하루를 기록해 본다.





연애스토리가 궁금하다면

<연애세포 되살리는 알퐁소 도데의 별> 번역 에세이를 찾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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