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로다짓기 최주선 Oct 17. 2023

시그니처 메뉴 사주는 지인

"저는 선생님이 좋아서요"


signature menu - Duck with...... 어쩌고 저쩌고 블라블라 메뉴.


"선생님 저랑 식사하실래요?"

현지 한글학교에서 만나 약 2년간 함께 했던 선생님이 식사 제안을 했다. 매주 토요일 만나기는 하지만 서로 자기 반 아이들 보느라 바쁘다. 따로 시간을 가진 적이 거의 없는 관계다. 흔쾌히 약속을 잡고 점심을 함께 했다. 서로의 스케줄로 약속이 2번 캔슬되고 다시 잡힌 약속이었다. 날씨 좋은 날 검은색에 초록색과 파란색, 빨간색이 고루 섞인 꽃무늬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전날 비가 와서 그런지 약간은 바람이 차게 느껴졌지만 기분만큼은 써니데이였다.


차 없이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남아공의 일상은 내가 운전을 하던지, 누군가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타야만 한다.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하는 선생님이 차로 집 앞까지 나를 데리러 왔다. 남자도 아니고, 데이트도 아닌데 설레기까지 했다. 가려고 했던 레스토랑이 전화를 받지 않아 열었는지 여부를 알 길이 가보는 것 밖에는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목적지를 바꿨다. 이 지역에서 나름 Hot하다는 핫플레이스로 운전대를 돌렸다.  

남아공의 봄, 어딜 가도 가로수를 덮은 보라색 자카란다가 황홀경까지 느끼게 만들어준다.

   

평범한 일상이지만, 가끔 이렇게 콧바람 쐬러 밖에 나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환기가 된다. 카페 거리에 들어서 아무 데나 빈 곳에 주차를 했다. 음식점을 정하지도 않은 채 그냥 걸었다. 맘에 드는 곳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둘 다 살랑거리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대학 수업 땡땡이치고 나들이 나간 소녀 마냥 돌아다녔다. 늘 그렇지만 식당에 가면 메뉴판을 들고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그어가며 정독해야 한다. 영어에 아프리칸스가 섞인 메뉴판은 그냥 보면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조금 시간을 가지고 뭐가 들어간 음식인지 적힌 메뉴 재료를 보고 나서야 겨우 주문한다. 가끔 실패도 하지만 대부분 비슷비슷해서 나오는 대로 먹는다.

누군가 음식을 대접해 주는 날에는 내 돈 주고 사 먹지 못하는 메뉴를 먹게 되는 날이 있는데, 그날이 바로 이 날이었다. 제법 괜찮아 보이는 프랑스 음식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절대 내 돈 주고는 사 먹지 못할 메뉴를 선뜻 주문하라며 집어 주었다. 그리고 같이 먹자고 했다. 제일 비싼 시그니처 메뉴, 남아공은 한국처럼 오리가 흔하지는 않다. 특정 마트에 생오리고기를 팔기는 하지만 아직 사 먹어본 적 없다. 이날 처음으로 6년 만에 오리를 먹었다.


"근데, 웬일로 식사하자고 하셨어요? 제가 너무 비싼 대접을 받는 것 같아요."


비싼 메뉴를 고르기가 미안해서 머뭇거릴 때 선생님이 한 마디 던졌다.


"저는 선생님 좋아하거든요. 맛있는 음식 대접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라고 심쿵, 가슴이 내려앉았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에게서 받는 고백. 어떤 대가나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친목 도모 차원에서 만나 서로 사는 이야기를 하는 게 전부였다. 가족 이야기, 사는 이야기, 하고 있는 일 이야기, 앞으로의 이야기까지. 그리 깊은 이야기가 오고 가지는 않았는데도 충분히 관계 안에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다. 관계란 그런 것 같다. 친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안 친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관계일 수도 있다. 음식과 대화, 서로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는 몇 마디로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이성 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참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중고등학교 시절,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냥 인사치레 같았다. 그랬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 나에게 좋은 감정, 좋은 말을 내 비치면 입꼬리가 올라가고 어깨가 으쓱하다.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던 중간 중간 내 뒷 배경과 구도가 예쁘다면서 찰칵 사진기에 담아줬다. 남편도 잘 안 찍어주는 사진인데. 피사체가 된다는 일은 쑥스럽기도 하고, 기분 좋기도 하다.


식사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디저트를 먹을까 하다가 못내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장소를 옮겨서 다른 곳에서 먹자고 제안했다. 내가 디저트를 살 생각이었다. 커피와 케이크를 사려고 했는데, 아이스크림 어떻냐는 제안에 팔짱을 끼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실, 나는 좀 추웠는데 선생님의 발랄한 제안에 홀딱 넘어갔다. 근처 맛있는 아이스크림 집에 들러 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커피숖 야외 테이블에 앉아 또 대화를 이어갔다. 평범한 일상 이야기인데도 뭔가 흥미로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 올라타기 전, 작은 옷가게를 둘러보며 이 옷 저 옷 들춰보고 구경했다. 한동안 같이 옷구경했던 친구가 없었다. 같이 쇼핑하면서 둘러볼 사람이 없었다. 그냥 일회적인 시간이지만 이 하루가 나에게는 잠시 일탈의 시간이 됐다. 동시에 친구들과 신나게 싸돌아다니던 시절의 추억에 잠겼다.


시그니처 메뉴 먹었다고, 남아공 와서 처음 오리고기를 먹었다고 그게 좋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다지 특별하다고 말할 수 없는 식사와 만남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다른 누군가와도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까.

그러나, 사람이 마음이 없이는 누군가에게 밥을 사고 시간을 내어 주는 게 쉬운 일도 아니다. 시간이 많아도 내 시간, 내 돈 들여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당연하지가 않다. 이상하게도 어떤 편견도 생각도 없이 그냥 그 시간에 충실할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고 이야기에 끄덕이면서 대화를 나누고 시간을 보냈다. 더불어 나는 누군가를 대할 때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 가를 생각해 보았다. 관계는 일방적일 수 없다. 먼 타지에서 서로에게 편견없이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는 것 자체도 내게는 감사할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아공에서 보내는 보통의 휴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