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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Dec 23. 2021

정전엔 김밥이지

세젤맛 냉털이 김밥




처음 알았다. 세상 제일 맛있는 김밥은 냉장고를 탈탈 털어 만든 냉털이 김밥이란 사실을,

물론 더 맛있는 김밥이 많겠지만, 이번 냉털이 김밥을 먹고는 눈이 번쩍 뜨였다. 냉장고에 어떤 재료가 들었는지에 따라서 내용물도 맛도 바뀌겠지만, 온갖 재료를 다 때려 넣어서 만든 냉털 김밥은 엄지를 치켜세우기에 충분했다.




정전 3일이 지나가자 냉기는 매우 약하게 남아있었다. 분명 내일이면 야채 썩는 냄새가 날 테고 냉장고에 있는 모든 음식물들을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게 될 일이었다. 먼저 냉동실에서 마른 재료를 제외한 온갖 재료를 몽땅 꺼냈다. 주방에 벌려놓고 살려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추려냈다. 당근, 오이, 달걀, 맛살, 단무지, 소고기 그리고 어묵과 달걀이 있었다. 누가 봐도 김밥 재료 아닌가!


"앗싸! 오늘 점심, 저녁은 둘 다 김밥이다!"


평소 먹고 싶어도 귀찮아서 잘 만들지 않던 김밥을 한 번에 많이 말아 한 번에 해치울 심산이었다. 좋아하지만 이곳에서는 비싸기도 하고, 파는 곳 찾기도 쉽지 않아 만들어 먹어야만 하는 김밥이다. 식구가 좋아하는 김밥도 먹고 저녁도 안 하고 일석이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얼었던 채소들은 거의 다 녹아서 해동시킬 필요도 없었지만, 냉장실에 있던 당근과 오이에는 온도차가 달라지면서 맺힌 물방울과 습기가 차있었다. 어차피 버너는 한 개뿐이라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없으니 재료를 손질하기 전 압력밥솥에 쌀을 씻어 넣고 버너에 올려 불을 붙였다. 신혼 초에는 전기밥솥을 두고도 압력밥솥에 한 밥이 더 맛있다는 엄마 말을 따라 일부러 압력밥솥에 밥을 하곤 했다. 전기밥솥보다 시간도 짧았다. 갓 지은 밥에 찰기와 윤기가 촤르르 나고 다 된 밥을 주걱으로 십자 그어 아래위를 뒤집은 후 공기가 위아래로 섞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 밥 맛이 더 올라가는 것 같았다. 밥이 되는 동안 재료를 썰어 프라이팬에 볶을 준비를 마쳤다. 공교롭게도 이전에도 두 차례 김밥을 만드려고 마음먹은 날에 정전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예고했기 때문에 재료를 미리 다 준비해놨었다. 덕분에 불이 없어도 어둑한 거실 식탁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각자 먹을 김밥을 말면서  소꿉놀이하듯 즐기면 됐다.




전기가 없어도 되는 환한 대낮에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가스레인지나 전기 걱정 없이 전기스토브에서 2~3구를 맘껏 사용하며 요리하는 것보다는 불편했지만, 버너면 충분했다. 5 식구 먹을 양으로 10줄을 말았다. 두당 한 줄에서 두 줄이면 되겠다 싶다가 저녁까지 먹어야 된다며 12줄을 말았다. 저녁까지 생각했다면 적어도 15줄은 말아야 했다. 더 말고 싶었지만 재료가 부족했다. 온갖 재료를 다 때려 넣은 김밥에 참기름과 깨소금을 솔솔 뿌려서 칼로 슥슥 썰어서 볼 한쪽 가득 넣고 씹으니 어우러진 맛이 일품이었다.  혹시 모자랄까 봐 냉동실에서 이제 곧 흐믈흐믈 해져버릴 것 같은 냉동만두, 아니 해동된 만두도 꺼내어서 프라이팬에 구웠다.



"엄마! 원래 구운 만두는 바삭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응 그렇지."

"그런데 얘는 왜 이렇게 흐물거려요?"


분명히 프라이팬에 바삭하게 구웠는데 젓가락으로 집어 드니 만두가 힘없이 고꾸라졌다. 여기서는 비싸서 자주 사 먹지도 못하는 한국 만두를 아껴먹겠다며 냉동실에 넣어두고는 빨리 안 먹은 걸 후회했다. 김밥에 만두 한국에서는 길거리에서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인데 여기서는 많이 귀하다.  다른 나라에 와서 살면서 자주 먹질 못하니 식탐도 없던 내가 가족들 생각한다며 가끔씩 음식 사치를 부릴 때가 있다. 다 먹고 살자는거지마 생활비 중에 가장 많이 나가는 돈은 집세, 학비 다음으로 식비다. 내 옷 한 벌이나 신발 한 켤레 잘 사지도 못하는데 늘 한 달 끝에는 통장 잔고가 탈탈이다. 여하튼, 정전 덕에 한 번에 분식 파티를 했으니 다들 잘 먹었다며 배 두들겼다.

  



버너 하나에 의지해 이것저것  먹으면서 부탄가스를 체크했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닳아 없어지는 가스 탓에    남은 부탄가스에 불안했다. 사야  판이었다. 그래도 부탄가스로 버너에 불붙여 굶지 않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삶의 소소한 부분들의 감사, 당연한 것들에 대한 감사가 절로 나오는 시간이다. 일상에서 무심코 당연하다 생각하며 쓰고 있는 전기, 가스, 생활 가전들까지 얼마나 유용한 물건들인지 찬찬히 둘러보며 모든 것에 감사한다.

다음 날 아침은 가스와 얼음을 사러 가는 것으로 시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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