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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다짓기 최주선 Dec 17. 2021

정전되면 심장마비 걸리겠구나

이 순간을 즐겨! 



”으악, 진짜 차가워. 엄마 어떻게 해요? 아 못하겠어. “      

“자, 지금이 여름이니까 다행인 거야. 와. 겨울이었어 봐. 찬물로 어떻게 씻니, 그래도 여름이라 감사하고 얼른 씻자.”      


사설이 길었다. 아이들 달래 보려고 던진 말이었지만, 여름이라 진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실내 난방이 없는 남아공의 겨울은 꽤 춥다. 뿐 아니라 전기로 데워지는 기저 안의 물은 꽤 오랜 시간 달궈져야 따뜻해진다.  겨울이었다면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열흘 꼬박 노숙자 냄새날 때까지 떡진 머리 긁어가며 참고 또 참았을지도 모르겠다. 첫날은 정전되기 전 남아있던 기저 안의 데워진 물 온도로 미지근하게 씻을 수 있었지만, 다음날부터는 냉수마찰이 몸으로 알았다. 이제 고작 여섯 살밖에 안 된 막내는 작년까지만 해도 몸에 찬물이 닿을 때마다 지르는 비명 섞인 울음소리가 담을 넘었다. 미처 기저 버튼을 올리지 못한 날이면 이미 울음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 물을 틀었다. 이제 한 살 더 먹었다고 씩씩한 목소리로 수영장 물처럼 생각하겠다는 꼬맹이의 말이 기특하기만 했다.

      

“자, 지금은 군대 왔다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까?” 


대체 '라테는 말이야'를 누구에게 적용하는 건지 아이들 안심시키겠다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하는 남편 말에 코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까르르 웃는 아이들 웃음소리와 마치 지금 당장 군인이라도 된 양 비장하게 찬물을 대하는 두 아들 녀석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여자라서 군대 갈 필요도 없다는 별이는 수영장이라 생각하겠다며 깊게 호흡한 뒤 웅크린 채 숨까지 참았다. 그렇게 찬물 샤워를 비장하게 마치고 난 뒤 드라이기를 쓸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대체 전기 없이 살았던 시대는 어떻게 살았을까? 그 시대는 지금의 편리함을 몰랐으니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알았을 거다. 조상의 지혜로 살았겠거니 생각해보지만 이미 생활의 편리함을 누리며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는 당최 상상이 안 되는 삶이다.  올해 들어 유난히 날씨가 이상하다. 비가 잘 오지 않는 남아공에 비가 엄청 자주 온다. 전기가 나가 있는 약 2주 동안 절반 이상은 비가 하루 종일 왔다. 밖에 나가지 않는 날에는 씻지 않지만, 학교도 가야 하고 바깥일을 보고 들어온 날에는 이 놈의 코로나 때문에 씻지 않고 침대에 눕는 일은 용납이 안됐다. 덕분에 찬물 샤워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전기로 할 수 없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우리 집을 비롯한 대부분 집은 전기스토브를 사용한다. 정수기를 비롯한 주방가전을 전부 쓸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전기밥솥은 물론 매우 편리한 에어 프라이기, 믹서기도 사용할 수 없다.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드라이기, 컴퓨터, 노트북, 와이파이, 휴대폰 충전, 전등, 선풍기, TV 등 온수 사용까지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이 다 전기가 필요하다. 디지털 방식이 편리하다며 디지털 드로잉만 주야장천 하다가 한동안 아날로그의 매력에 빠진 적이 있었다. 아이패드 미뤄 놓고 뭔가 좀 멋져 보이는 펜 드로잉도 해보고, 노트에 색연필과 펜을 이용해서 손 마인드 맵을 그렸다. 전자책 보다 종이 책이 좋다며 종이 책을 찾았다. 그러나 내 맘대로 전자기기의 사용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과는 달랐다. 몇 시간도 채 사용하지 못하고 금방 닳아 버리는 아이패드 배터리를 아끼려고 잘 켜지도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괜히 한 번씩 만져보기도 했다. 전기를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전기스토브 대신에 1 화구 가스버너를 내렸다. 거기에 압력밥솥으로 밥을 했고, 주전자로 물을 끓였다. 프라이팬 하나 얹어 요리를 했다. 세탁기 대신 발로 밟고 손빨래를 하고, 청소기 대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사용했다. 냉장고 대신 최소한의 음식물을 보관할 수 있는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사다 왕창 집어넣었다. 와이파이 대신 데이터를 사서 꼭 필요한 곳에만 사용했다. 그러나 전기를 대신할 수 없는 것은 휴대폰 기능이었다. 연락을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덕분에 전기를 충전하러 차 시동을 켜고 휴대폰 충전을 하고, 다른 지역의 카페로 가야 했다. 버틸 만큼 버텨보고 할 만큼도 했다.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으니 평소에 하던 온라인 활동들도 전부 멈추었다. 줌 미팅은커녕 매일 들어가던 인스타그램과 블로그, 브런치, 여러 카페들까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해야 할 일을 못한다는 생각에 답답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자 편리함이 찾아왔다. 시간이 많아졌고, 다른 일에 몰두할 시간이 생겼다. 거의 집안 청소와 냄새나는 냉장고를 치우는 시간들이었지만 아이들과 좀 더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바깥일을 시간제한 없이 볼 수도 있었다. 휴대폰의 남은 배터리와 데이터는 거의 전자책 보는 것과 카톡에만 사용했다. 때로는 의도지 않은 상황에서 만나는 유익함도 있다. 전자기기 하나 돌아가는 소리 들리지 않는 집은 고요했다. 의도해서 나는 소음 외에는 어떤 소음도 나지 않았다. 온 동네가 조용하고 캄캄했다.  이런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느껴지는 그 고요함이 좋았다. 




심장마비 걸릴 듯한 찬물로 샤워했지만, 고요함 속에서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감사가 나왔다. 


"물이 안 끊긴 게 어디야? 차라리 전기가 나가는 게 나은 것 같아. 물 안 나오면 진짜 어후." 


이따금 단수도 되는데 어딘가 물이 새거나 점검하는 날 2~3시간 정도다. 잠깐만 물이 안 나와도 무척 불편했다. 정전이 되니 불편한 것 투성인데 찬물이라도 나오는 것에 대한 감사가 깊어졌다. 

물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어디 있을까? 

찬물이라도 좋으니 제발 단수만 되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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