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다지오 템포의 자전거 여행 - 바이욘 사원 한 바퀴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by 도인

"자자, 이제 며칠 뒤면 한 달 살았던 이곳 씨엠립을 떠나서 드디어 꼬창 섬으로 넘어가. 도인,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거 있어?"

"음…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데 앙코르와트만 보고 다른 사원은 못 둘러봤잖아? 자전거 타고 사원 한 번 더 다녀오면 어때? 바이욘 사원 가자. 거기 좀 멋있잖아."

"흠… 그래. 우리 원래 자전거 타고 아침마다 사원을 목적 없이 페달링 하는 게 목표였는데, 어쩌다 보니 나무늘보처럼 늘어져 있었네. 가자. 근데 너 이번엔 진짜 조심해야 해. 사고 나면 안 돼."

H와 나 모두 씨엠립은 두 번째 방문이었고, 날씨도 더웠기에 관광은 제쳐두고 숙소 수영장, 근처 카페, 식당만 오가며 마치 휴양하듯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며칠 남지 않은 캄보디아 비자 만료일을 앞두고 19년 전, 사원만 둘러보고 떠났을 때 인상 깊었던 바이욘 사원을 다시 보기로 했다.

H가 구글 지도를 켜고 자전거 길을 검색했다.

"H는 큰길처럼 차 많이 다니는 데서 자전거 타는 걸 싫어하니까, 강변 따라 조용한 길로 가자. 사원 근처까지."

식당 검색은 내 몫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까. 구글 후기를 챙겨 읽으며 가는 길에 있는 맛집들을 찾아본다. 되도록이면 여행자들을 위한 식당보다는 현지인 맛집을 고른다. 기안84가 로컬병 걸렸다며 여행 프로그램에서 손으로 이것저것 집어 먹는 걸 언젠가 봤는데 나도 로컬병 중증이다. '예전엔 더럽다고 못 먹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사원 근처에 식당 몇 군데를 구글맵에 마크했다. 시원한 얼음 가득한 음료도 필요할 테니, 카페도 몇 군데 저장해 두었다.


다음날 아침, 전날 저녁 미리 2달러를 주고 빌려 둔 자전거에 올랐다.

'이번엔 절대 빠르게 가지 말아야지. 내 삶의 템포는 아다지오야. 잊지 마, 도인!'


운동을 하다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속도를 내고 주변을 살피지 않게 될 때가 있다.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나도, 함께 여행하는 H도 곤란하니까 안전하게 천천히 달리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빠른 템포의 음악을 들으면 비트에 맞춰 페달링을 하게 될 것 같아서 장기하의 "그건 니 생각이고"를 틀었다.


"그냥 니 갈 길 가. 이러쿵저러쿵 뭐라 뭐라 뭐라 해도 상관 말고…"


나도 모르게 흥얼거렸다. 언제 들어도 통쾌한 노래다. 혹시 내 삶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노래를 꼭 들려주고 싶다. 한 소절 빌려 말해주고 싶다.

"그건 니 생각이고, 저는 아주 노멀 한,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답니다."
아무도 내게 내 삶이 이상하다 말하는 사람이 없지만 아무튼 혼자 이런저런 우스운 생각을 하며 한참 자전거를 달리다 보니, 문득 갈증이 밀려온다.


"H 멈춰! 나 목말라. 커피 마시고 가자."


커피를 시켜두고 창밖을 보니, 자전거로 사원 투어를 떠나는 서양인 관광객 무리가 지나간다.


"근데 도인, 왜 씨엠립엔 동양인 관광객이 잘 안 보여? 거의 다 서양인들 아니야?"


"내가 보니까 여기가 자기 나라에서 가까우니까 3박 4일, 4박 5일 앙코르와트 패키지여행으로 짧게 보고 가는 것 같아. 단체 여행으로 말이지."


"씨엠립이 도시이긴 하지만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시골 느낌도 나고, 둘 다 즐기기에 좋은데… 사원만 보고 가는 건 좀 아쉬운 거 같아."


"그러게. 나도 전에 왔을 땐 사원만 보고 갔는데, 다시 와보니 여기 너무 오래 지내기 좋은 곳이야."


"그치? 수영장 있는 깨끗한 숙소, 맛있는 식당, 시원하고 일하기 편한 카페들…"


"난 자전거 탈 수 있는 게 너무 좋아. 씨엠립 근처는 다 평평하잖아. 날씨만 안 더우면 사원 매일 한 바퀴씩 돌 텐데. 로드 타고 말이야. 그리고 헬스장 하루 입장료가 1불이라니… 진짜 너무 싸잖아."


"맞아. 모든 게 너무 저렴해. 그런데다 2025년에 이렇게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 있다는 게 기적 같아. 매번 사심 없이 친절하니까 오히려 내가 미안할 정도야."


"H, 날 이 여행에 초대해 줘서 고마워. 여길 다시 오게 될 줄 몰랐는데… 덕분에 좋은 추억을 쌓았어. 특히 오늘 다시 보게 될 바이욘 사원도 기대돼."


"내가 더 고맙지. 자전거 여행에 동참해 줘서. 물론 자전거는 오늘까지 두 번밖에 못 타긴 했지만.. 하하!"


카페에 앉아 시원한 얼음 음료를 마시며 에어컨 바람을 쐬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햇볕의 열기와 과열된 근육으로 달궈졌던 몸이 서서히 식어갔다. 이제 다시 페달을 밟을 준비가 된 듯하다. 사방은 울창한 나무들로 가득한 도로. 사계절 내내 여름인 이곳은 짙푸른 초록으로 완전히 뒤덮여 있다.


"이런 곳을 매일 해질 무렵 자전거 타고 올 수 있다면 어떨까… 다시 또 오게 될까, 이곳에?"


풍경을 바라보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사원 가까이에 있는 호숫가에 도착했다. 근처 벤치에 앉아 한동안 조용히 물을 바라본다. 바람 한 점 없는 수면 위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호수는 아무 말 없이 세상의 소음을 잠재웠다. 이런 고요함 앞에서는 괜히 마음속까지 투명해지는 기분이다. 문득, ‘이런 곳에서라면 아무 말 없이 하루 종일 앉아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관광지 근처라 그런지, 우리나라 시골 변두리 가든 식당처럼 생긴 곳들이 곳곳에 보인다. 조금은 촌스럽고, 조금은 정겹다. 검색해 둔 맛집에 굳이 갈 필요도 없이, 바삭하게 구워진 돼지고기가 걸려 있는 식당으로 자석에 이끌리듯 들어갔다. 오늘 메뉴는 돼지고기구이 한 접시와 프라혹 떡갈비 구이.


프라혹은 발효된 생선으로 만든 캄보디아 전통 소스다. 프라혹 떡갈비를 주문하자 식당 주인아주머니가 망설이며 말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좋아하는데, 외국인은 싫어해요. 시키지 마세요."


하지만 로컬병이 심각한 우리에겐 캄보디아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하면 거부할 이유가 없다. 결국 너무 맛있게 싹싹 긁어먹었다. 생야채를 씹고, 고기를 씹고, 프라혹 떡갈비를 한입 떠 넣으며.


"H, 저건 뭐 같아? 저 찜솥에 든 거 말이야?"

"아니, 먹으면서 벌써 다음 먹을 거 생각해?"

"봐봐, 맛집이 분명해. 줄 서서 사잖아. 저거 꼭 먹어야 해, 우리."


식탐 많은 나는 입을 오물거리며 다음 먹을 것을 탐색한다. 찜솥에 코코넛 카스타드 같은 캄보디아 디저트를 쉴 새 없이 쪄내는 가게였다. 결국 우리도 막 쪄낸 코코아빵 여섯 개를 샀다. 식당 옆 조그만 카페에서 타로 버블티와 패션프루츠 음료를 주문해,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마무리.


한참을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덧 오후 5시 30분. 사원 무료입장 시간이다. 자전거를 타고 바이욘 사원 방향으로 향했다. 해가 점점 기울고 있었다.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와트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웠다. 관광객이 모두 빠져나간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거의 우리 둘만 전세를 낸 것처럼 고요했다. 나무뿌리가 사원을 타고 뒤엉켜 있는 모습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웠다.


"여기 진짜 멋지다. 와...."

"그치, 여기에 그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갔을까? 상상해 봐."

"그러니까. 이 색감 좀 봐.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것 같아. 이 사원 건물들 진짜 멋있어. 어딜 찍어도 다 예술이야."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사원을 빠져나오며 자꾸 뒤를 돌아봤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세상에는 또 얼마나 갈 곳이 많은가? 여길 다시 오게 될 날이 있을까 생각하며 더 어두워지기 전에 자전거로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여행도 성공했네. 바이욘 사원 안 봤으면 어쩔 뻔했어! 고마워, H! 나 좀 신나는데 씽씽 자전거 달려볼까?"


"도인, 아다지오 템포가 너의 새로운 삶의 속도라며? 또 잊었어?"


"아, 맞다. 미안 미안. 또 잊었네. 천천히 가자. 급할 게 뭐가 있어, 매일이 휴일인데."




#매일이휴일 #은퇴자의삶 #호젓함 #소요유 #미니멀리즘 #아다지오 #슬로우라이프 #디지털노마드 #친구랑세계여행 #에세이 #소설 #발코니에서글쓰기 #도인작가 #Dbalcony출판사 #바디빌딩 #프리다이빙 #디저트 #영국 #영국문화 #건강사랑자유 #캄보디아 #씨엠립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