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씨엠립에서
“오늘은 헬스 안 가도 될 것 같아. 여긴 진짜 장난 아니야. 앙코르 비어, 캄보디아 비어, 네가 좋아하는 하누만 비어 부스까지 다 있어. 게다가 맥주도 싸.”
나는 붐비는 거리 한가운데서 H에게 말했다. 몇 주 전부터 강변에는 새해를 준비하는 손길이 분주했지만, 실제로 마주한 축제의 열기는 차원이 달랐다.
“근데 이 사람들 진짜 놀 줄 모른다. 한국 사람들이었으면 아침부터 술 마셨을걸?”
“하하, 한국인들 진짜 그렇게 술 많이 마셔?”
“너 몰랐구나? 테이블 밑에 소주 박스를 숨겨놓고, 밥 먹을 때마다 한 병씩 여는 나라야. ‘미쏘’라고 들어봤어? 미지근한 소주의 줄임말인데, 그걸 즐기면 진짜 한국 술꾼 소리를 듣지.”
“근데 너 잠 못 잔다고 술 끊는다고 하지 않았어?”
“이런 날은 예외지. 이런 날 술 안 마시겠다고? 그건 예의가 아니지. 무례한 거야.”
크메르 새해(Sangkran)는 태국의 송끄란(Songkran)처럼 물을 뿌리며 한 해의 액운을 씻고 복을 기원하는 의식이지만, 단순한 전통을 넘어 하나의 대형 거리 축제가 되었다.
아침에 들렀던 사원들에서는 고요하고 경건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오후가 되자 분위기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거리는 물총으로 무장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오토바이, 픽업트럭, 길 위를 가득 메운 인파—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서로에게 물을 쏘고 맞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흰색 베이비파우더는 어느새 얼굴마다 덕지덕지 발려 있고, 시간도 걱정도 잊은 얼굴들 속에서 나 역시 덩달아 들떴다.
도로는 경찰이 통제하고, 차량 대신 사람들이 점령했다. 상점 앞마다 놓인 커다란 물통과 호스는 누구나 쓸 수 있었고, 강변에 세워진 맥주 부스에서는 DJ가 쏘아 올린 비트와 거품이 공중을 메웠다. 도시는 잠시 놀이 공원으로 바뀌었다. 음악에 몸을 맡긴 사람들, 물을 맞으며 샤워하듯 웃는 아이들, 부모 트럭을 타고 거리에 등장한 청소년들까지. 이들은 '축제'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
“아 내가 잘못 생각했네. 아침에 했던 말 취소. 이 사람들 진짜 놀 줄 아네. 태국 송크란 축제 같은 거잖아. 이거 평생 못 볼 줄 알았는데 이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너무 신난다.”
나는 한국의 공립 초등학교 교사로 16년을 일했고, 작년 1년간 휴직을 한 뒤 올해 3월 1일 퇴직했다. 방학 덕에 여행은 자주 다녔지만, 늘 학기 일정에 맞춰야 했기에 가고 싶은 축제는 대부분 ‘다음에’로 미뤄야 했다. 태국 송크란, 독일 옥토버페스트, 스페인 토마토 축제…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은퇴한 지금의 나는, 내 시간을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사용할 수 있다. 월요일 아침마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조용히 글을 쓰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고맙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모든 건 결국 ‘선택’이었다.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인생이란 없었다. 내가 그려본 삶의 모습을 따라, 그냥 걸어가면 됐다. 그렇게 휘적휘적 걸어가다 보면 눈앞에 하나 둘 내가 꿈꿨던 삶이 펼쳐졌다. 이루기 위해 아무것도 애쓸 필요가 없었다.
“나도 그런 삶을 10년 전에 선택했잖아. 뭐 남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누가 뭐래도 내가 선택한 이 삶은 성공한 것 같아.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나로 있을 수 있잖아. 난 좋아, 이 삶이.”
"그렇지? 이제야 이걸 깨닫다니. 아니 지금이라도 다행이야. 난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감사해. 그때는 몰랐는데 뒤에 지나고 보니 다 결국은 나에게 좋은 일이었어."
나는 웃으며 대꾸했다.
“그나저나 나 저 거품 속으로 들어가서 샤워 좀 하고 올게. 너무 덥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순 없잖아? H,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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