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씨엠립에서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국경을 넘어 태국 꼬창으로 가는 길. 오전 9시 30분, 여행자 버스를 타고 5시간째 꼼짝없이 흔들리고 있다. 어둑할 때 타서 한숨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날은 이미 밝고 풍경은 바뀌어 있다. 버스 안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여행에 대한 기대가 가득 찬 열기가 한데 뒤섞였다.
옆자리에 앉은 H는 멀미 한 점 없이 전자책에 완전히 빠져 있다. 시트에 기대어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페이지를 넘긴다.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 영문판. 난 버스에서 멀미 때문에 눈도 제대로 못 뜨는데, 대단해, 정말.
지루함에 시달리던 찰나, H가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린다.
“도인, bunsick이 뭐야?”
“Bunsick?”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H의 전자책을 들여다봤다.
“…아! 분식!!”
나는 피식 웃으며 설명을 덧붙인다.
“분식은 말이지, 한국에서 흔히 먹는 간단한 길거리 음식이야. 떡볶이, 김밥, 튀김, 라면 같은 거. 주로 어린 학생들이나 젊은 여자들이 많이 먹어. 너랑 나도 갔잖아, 전주에서—기억나지?”
“오오, 떡볶이랑 스팸 김밥 먹었잖아! 너무 맛있었어. 사실 나 한국에 있을 땐 한 번도 못 먹어봤거든. 네 덕분에 처음 먹은 거야. 진짜 고마웠어.”
"아, 그런데 다시 생각해도 내가 그날 떡볶이 가게에서 식사를 대접한 건 좀 아쉽다. 상다리 부서지는 전주 한정식 한 상 같은 거 먹었어야 했는데... 그런데 난 그게 다 한국의 정서 같기도 해서, 문화 전수 차원에서 하하."
"도인, 무슨 소리야. 나 너무 좋았어. 한국에 있는 동안 사실 떡볶이 한 번도 못 먹었었거든. 그런데 네 덕에 먹게 됐잖아. 소녀들의 식사랬나. 거기에 한국인의 사랑 스팸 김밥도 맛있었다고! 너무 고마워."
“근데 그런 단어, 아무 설명도 없이 이탤릭체로 쓰면 외국인 입장에선 얼마나 헷갈릴까 싶네. 나도 처음엔 뭔 소린가 했다니까.”
우리는 킥킥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도인, 너 캄보디아에서 뭐가 제일 맛있었어?”
“하나만 고르기엔 너무 어려워... 넌?”
H는 잠시 눈을 굴리더니 웃으며 말한다.
"난 뭐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네. 너무 다양한 걸 먹어서... 너 사진 다 찍어뒀잖아. 그거 좀 보여줘 봐, 골라보게."
사진첩을 넘기다 보니 진짜, 장관이다. 디저트, 로컬 샐러드, 튀김, 생선 요리, 고기, 다시 디저트...
“아! 이거. 나 이게 원픽이야.” H가 휴대폰 화면을 탁 짚는다.
“뭔데?”
“맥주랑 땅콩!” H가 눈을 반짝인다.
“하하하, 역시 영국인!”
“캄보디아 양념 땅콩이 그렇게 맛있을 줄 몰랐어. 라임향이랑 갈릭 파우더, 약간 매콤한 고춧가루까지 섞여 있어서 계속 손이 가더라. 우리 3kg은 먹지 않았을까?”
“틀림없어. 시장에서 두 번 샀고, 식당에서도 계속 시켜 먹었고, 길에서도 샀잖아. 마치 중독된 사람들처럼.”
“그럼 너는? 도인의 원픽?”
“디저트지. 말해 뭐 해. 특히 바나나 튀김. 겉은 정말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고 달콤한 바나나가 딱 들어 있어. 튀김옷이 약간 코코넛 향 나지 않았어?”
“맞아. 코코넛 플레이크 들어간 거야. 그럼에도 난 바나나 찹쌀밥이 가장 맛있었네. 나 그냥 코코넛 밀크로 만든 찹쌀밥은 다 좋아하는 거 같아. 쫄깃하고 적당히 달고 음~~"
"와, 이 디저트 가게 진짜 좋았지. 그랜마스 디저트 가게. 팔고 있는 4가지 디저트 다 너~~~ 무 맛있었어. 특히 이 두 가지. 바삭하게 구운 코코넛 디저트와 녹두 디저트. 가게 이름에 할머니가 들어갔으면 우리 다 가보자."
“좋은 생각이야! 할머니가 만든 거라 그런가? 진짜 사랑 가득한 맛이었어. 다음에도 가면 무조건 재방문.”
“그리고 애프터눈 티!” H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내가 애프터눈 티를 먹으러 또 갈 줄이야. 싱가포르 여행 가서 무슨 호텔에서 먹었는데, 영국인들은 이런 걸 먹네 신기하다 싶었거든. 디저트만 있을 줄 알았는데 짠 것도 있고, 아무튼 음식 구성이 특이했어.”
"음... 여기 애프터눈티 음식이 썩 맛있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도인 너 영국 언제 올 거야? 오면 같이 크림 티 먹으러 가자. 스콘에 잼이랑 크림 얹어 먹으면 유후~~ 제대로 다시 알려줄게."
"디저트도 좋은데, 영국 가서 가장 먹어보고 싶은 건 선데이 로스트... 바디빌더로서 그만한 음식이 없을 것 같아. 매일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요크셔 푸딩과 함께 먹어야 돼. 이제보니 도인의 영국 여행을 계획해 봐야겠는 걸?!"
“그런데 기억나? 완전 현지인들만 가득했던 소고기 구이집? 생후추 듬뿍 올려진 고기 굽는 냄새만으로도 이미 반은 성공이었지.”
“바디빌더 도인에겐 딱이었겠네. 네가 이 소고기 구이집은 매일 올 수 있다고 했잖아?”
“진심이었어.”
"너 샌드위치 좋아한다고 해서 찾아간 현지인 맛집 놈빵 가게... 밥 먹기에 좋은 환경은 결코 아니었다... 휴"
"하하, 그러게, 좀 지저분하긴 했지? 묵묵히 드셔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래도 소고기 꼬치 훈제향이 좋았잖아?"
"아, 여기도 현지인 맛집이었지! 태국 푸팟퐁커리 같은 이 게 요리 밥 비벼 먹으니 꿀맛이고, 난 한국에서도 속초에 가서도 아바이 순대를 먹었다고. 단연코 오징어 구이 너무 맛있었어."
“나도 오징어 구이. 진짜 지금도 입 안에서 그 불향이 감도는 것 같아.”
“우리가 가장 많이 먹은 건 샐러드였던 것 같아. 망고, 파파야, 바나나 꽃... 다 피시소스에 절여져서 비슷한 맛이긴 했지만. 근데 넌 피시소스 적응 아직 안 됐지?”
“응... 너무 강하면 좀 힘들어. 특히 프라혹! 생선향 폭탄이야.”
“진짜 이 지역의 소스들은 강렬하지. 근데 이게 또 익숙해지면 중독되기도 해.”
“그건 그렇고, 닭발은 왜... 왜 넣는 걸까? 그냥 닭가슴살 먹으면 안 되나?”
“닭발은 식감 때문에 먹나 싶기는 한데... 하지만 난 이해 못 해.”
“그리고 도인, 나 발룻 시킨 거 아직도 충격이야. 부화 직전의 오리알이라니… 도전 정신은 인정!”
“결국 못 먹었잖아. 한 입 베어무는 순간, 난 인간의 한계를 느꼈지. 털이랑 눈이랑.... 휴.... 아무리 로컬병이 심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지. 현지인들이 먹는 모습을 보면 별미인 게 분명한데.. 다시 한번 도전해 볼걸 아쉽다..”
"이것도 캄보디아 사람들 아침, 점심으로 먹는 거잖아. 커리 국수. 왜 베트남은 맑은 국물의 쌀국수가 많잖아? 태국은 아주 걸쭉한 커리가 많고. 캄보디아는 그 위치상 그 중간에 있어서 그런지 음식도 그 중간 어디쯤인 것 같아."
"맞아. 이 카레 국수 보면 너무 묵직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그런 정도의 국물이지? 난 이 다양한 생향신 야채들 너무 좋아. 보라색 줄기에 노란색 꽃이라니."
"이 프라혹소스에 비벼 먹는 비빔 국수도 별미였지."
"난 여전히 생선 액젓 향 강한 건 별로지만 야채가 매우 신선해서 좋았어!"
"그 외에도 진짜 많아… 이것 좀 봐!"
나는 휴대폰 화면을 H에게 들이밀었다. 갤러리를 스크롤할 때마다 바삭한 튀김, 해산물 한 접시, 형형색색 디저트가 홍수처럼 쏟아진다.
"사진 찍어두니까 좋지? 뭐 먹었는지 기억도 나고."
H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솔직히 말하면, 네가 셔터 누를 때마다 기다리느라 좀 힘들었어… 에헴."
"맞지? 앞으로도 조금만 더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아요."
"네, 얼마든지요. 도인님이 찍겠다고 하시면 제가 기다려야죠."
버스가 한 번 크게 흔들렸다. 창밖으로 푯말이 스쳐 지나간다.
"와, 벌써 국경이네.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순식간이야."
"이제 태국이야. 태국도 10년 만에 다시 오네. 그 10년 사이에 내가 이렇게 변하다니."
H가 창밖을 바라보며 묻는다.
"어때? 새로운 너로 다시 오는 태국이?"
나는 숨을 고르며 생각한다.
"음… 태국은 여섯 번째인가? 솔직히 설렌다고 하긴 어렵지만, 이제 난 사실 어디를 가도 과하게 들뜨진 않아. 대신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매일의 하루하루가 전부 소중해. 태국에서의 날들도 마찬가지로 진귀한 선물이겠지. 그 나날을 최대치로 살아볼 거야. '내일 죽더라도 아쉽지 않도록, 평범한 삶을 최선을 다해 산다'... 가 내 삶의 모토야"
H가 내 말을 조용히 듣다가 환하게 미소 짓는다.
"좋은데? 선뜻 캄보디아 여행 제안에 응해줘서 고마워. 태국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도인님."
"아무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함께 여행하며 정말 즐거웠어. 19년 전에 혼자 왔던 캄보디아는 덥고 외롭고, 조금은 공허했는데… 이번엔 달랐어. 여전히 덥긴 했지만 마음은 꽉 차 있었어. 이제 내가 뭘 좋아하고 원하는지 확실히 아니까, 다시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거야."
H가 진심이 담긴 목소리로 말한다.
"도인, 너의 노멀라이프—그러니까 ‘평범하지만 충만한 일상’—항상 응원할게."
"고마워. 나의 노멀라이프, 앞으로도 쭉!"
캄보디아 씨엠립에서의 노멀라이프 연재는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다음은 푸른 바다와 밀림이 만나는 섬, 태국 꼬창의 노멀라이프 이야기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