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 속으로...

by 로마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입니다.

밤사이 눈이 내렸나 봅니다.

창으로 보이는 밖은 온통 하얀 세상입니다.

아침이면 항상 바라보던 먼산도 하얀 설산입니다.

나무도 지붕도 골목에 주차된 차량도 온통 하얗게 눈으로 뒤덮여 이아침 풍경은 다른 세상을 만난 듯합니다.


하얀 세상인 밖으로 나갑니다.

골목에 주차된 애마도 하얀 눈옷을 입었습니다.

시동을 걸어둔 채 수북이 쌓인 눈을 치우고 있는 애마 가까이 하얀 눈 위에 아기와 엄마가 있습니다.

사박거리는 눈을 밟으며 신나 하는 아기는, 휴대폰을 들고서 사진을 찍으려는 엄마의 부름에 모자와 목도리를 두르고 마스크로 꽁꽁 싸맨 눈 위의 아기가 엄마를 바라보며 한껏 귀여움을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기다리던 택시를 타고 훌쩍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차에 오릅니다.

세차게 불어오는 칼바람에 몰아치곤 흩어지는 눈발들이 간간히 앞이 보이지 않게 만듭니다.

눈보라 속으로 천천히 차는 움직이고, 시야확보가 힘든 눈보라에 살짝의 두려움과 함께 출발합니다.

도로 양옆 건물 위의 쌓인 한 무리의 눈들이 거센 바람에, 흩어지며 날리는 눈가루들이 햇살에 부딪혀 반짝입니다. 높은 곳에서 햇살사이로 이지 저리 휘몰아치며 날리는 하얀 눈가루들의 반짝임에 눈이 부십니다.


차창 앞으로 몰아치는 눈보라는, 마치 회로리바람 부는 눈 덮인 시베리아를 혼자서 횡단하고 있는 듯한 날 선 긴장감에 잔뜩 겁먹어 차량의 속도는 걷는 것보다 조금 더 빠릅니다.

간장한 탓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 운전대를 꽉 잡은 채 신호대기 중 반대편 차량들도 멈추어 있고,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는 교차로에서 몰아치는 눈보라는 낯선 광경입니다. 광야에서나 휘 몰아 칠 것 같은 무서운 기세의 눈보라를 바라보다가 문득, 교차로를 지나면 설국으로 가는 길이 나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듭니다.

눈보라 치는 교차로에서 신호대기 중 설국을 생각해 보지만 좀처럼 설국에 대한 상상이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어릴 때 읽었던 안개나라 사람들은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귀가 발달하여 토끼귀처럼, 귀가 큰 안개나라사람들은 상상 속에 살고 있지만, 설국은 삿포로가 생각날 뿐 상상이 안됩니다.

너무나 현실적인 어른이 되어버려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그러한 동심이 사라져 버린 탓에, 상상을 할 수가 없는 어른이 되어버렸나 봅니다.


악천후 속 이렇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 가고 있는 목적지는, 예약 날짜를 착각하여 어제도 갔으나, 예약일이 오늘 이기에 또다시 가야 할 병원입니다.

어제 방문을 했지만 예약일 진료를 재차 강조하여 못내 섭섭하던 그곳으로, 시베리아 횡단하는 기분으로 몰아치는 눈보라 속을 뚫고 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약일을 휴대폰 메모를 해둔 상태이지만, 메모는 전혀 도움이 안 되었고, 날짜 또한 기억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생각이 그날이 오늘이라고 느끼게끔 혼돈을 만듭니다.

예약을 확인하고 가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 조차도 생각이 나질 않아 두 번, 세 번 몸이 고생입니다.

진료 후 결재를 안 하고 오던 그날의 놀라움은 상처가 될 만큼의 큰일이었지만, 일상다반사인 실수는 이젠 '아!' 하고 탄식만으로 그칩니다.

입춘부터 시작된 매서운 추위와 거센 눈보라는 맹렬히 동장군의 위력을 떨치며 제대로 된 겨울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며칠째 이어지는 추위는 봄이 가까이 오는 걸 아주 강하게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눈보라 치던 그날 이후 일주일이 지나고, 추위가 끝나려나 할 무렵에 오늘 다시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밤사이 내리던 눈이 여전히 내리고 있지만 간혹 약한 비도 함께 내리는 탓에 많이 쌓이지는 습니다.

눈송이도 작고 내리면서 녹기에 소복소복 쌓이는 양도 많지 않고 바람 또한 불지 않기에 그날, 눈보라 치던 날과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조용히 눈 내리는 풍경은 아침 그대로의 모습으로, 차분히 눈 내리는 풍경을 좀 더 오랫동안 보고 싶어 져 눈을 맞으며 조용한 겨울 공원으로 갑니다.

하얀 세상으로 사박사박 흰 눈을 밟으러 갑니다.

이제 곧 봄이 올 테니 새하얀 눈이 이제 내릴 날이 많지가 않을 테니까요.



<사진 - 눈 밟으러 간 겨울 공원에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눈오리>

시는 제가 좋아하는 시여서 올려봅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