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으로 온 여름휴가를 마치고 한국 돌아가기 위해 깜란 공항을 찾았다. 밤 12시 5분 비행이었지만 9시가 되기도 전에 넉넉하게 깜란 공항에 도착했다.
6시간의 긴 비행시간을 앞두고 콧물약을 먹은 둘째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국 도착하는 날 오후에 예정된 매우 근엄한 회의 담당자라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동남아 더운 날씨에 물 대신 맥주를 마셔대어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에겐 위경련이 찾아왔다. 경험 상 점점 더 아파질 터였다. 빨리 체크인하고 쉬기 위해 항공사 카운터에 가서 당당히 여권 4개를 내밀었다. 베트남 사람 특유의 밝은 미소로 환대하며 여권을 받아 들고 키보드를 두들기던 직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몇 번이고 모니터와 여권을 번갈아 보더니 심호흡을 크게 하고 우리 가족을 향해 선고를 내리듯 말했다.
“당신들의 비행기는 이미 떠났습니다.”
나란 인간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때까지만 해도 직원이 단단히 실수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무슨 말씀이시죠? 저희는 12시 5분 비행기를 예약했고 3시간이나 미리 왔는데요. “
그는 더 이상 이 괴로운 대화는 나눌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휘저으며 달력을 꺼내 들고 말했다.
“맞아요. 하지만 당신들은 9일 새벽 12시 5분 비행기를 예약했어요.”
“오늘이 9일인데요??”
”당신들이 예약한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12시간 전에 왔었어야 했어요. 지금 타려는 건 10일 새벽 12시 5분 비행입니다. “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하루 전 비행기로 잘못 예약했던 것이다.
일터에서 남의 비행기도 수두룩 하게 예약해 보았던 나는 비행기를 놓쳤다는 사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거만한 생각을 하곤 했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줄이야…
괴로움에 치를 떠는 것도 잠시, 문득 비행기표 결제는 내가 했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등이 땀으로 젖기 시작했다. 남편을 슬쩍 올려다보자 무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감정 상태는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번데기처럼 쭈글쭈글 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내게 친절한 베트남 직원이 현자처럼 알려주었다.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셔야 합니다. 근처 호텔 가서 하루 자고 오세요.”
내 사정 따위는 궁금해하지 않을 그들에게 내일 당장 회사로복귀하지 않으면 재앙이 벌어질 것이라며 사색이 되어 하소연했고, 한쪽 구석에서 우리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다른 한 직원이 전화기를 들고 여기저기 알아봐 주었다. 전화 통화 후 어디론가 뛰어갔다 20분 만에 돌아온 그녀는 타 항공사 마지막 비행기에 좌석이 남았다면서 원하면 결제까지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눈부신 빛 한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땡큐베리머취, 베리감사, 그라씨아스, 생명의 은인에게 감사 인사를 퍼부었다. 세계 어딜 가던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사람이 꼭 있다. 그래서 아직 세상은 살 만한 거지.
격한 인류에를 만끽하기도 잠시, 신용카드를 전달받은 그녀가 이내 영수증과 함께 돌아왔고 150만 원은 그렇게 우리 월급쟁이 유리지갑에서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아이들이 왜 비행기가 잘못 예약된 거냐고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남편의 표정을 살피며 다급해진 나는 사악한 방울뱀 소리를 내며 아이들의 입을 막았다.
나보단 경제관념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가끔은 소비에 대한 쓴소리를 하는 그이다. 평생 주식계좌 한 번 개설 안 해보고 개미처럼 모아 그저 개미처럼 사는 게 꿈인 나란 인간과는 다르다. 남편이 투자 얘기할 때도, “오빠가 하고 싶으면 해. 나는 그냥 모은 거 쓰면서 사는 게 좋아. “라며 속 터지는 현실감 제로의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인간이다. 이런 나인지라 남편이 150만 원을 해 먹었다면 속은 조금 상하겠지만 큰 감흥이 없었을 텐데, 더 똘똘한(?) 남편은 아니지 않을까. 의심하며 맘을 졸였다. 뭐라 한 소리 들어도 할 말 없는 상황 아닌가.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항공권 추가 결제로 150만을 더 냈자고 하자 그는 내내 무표정했던 얼굴을 풀고는
“우리가 처음 샀던 항공권보다 오히려 싼데? ”라고 심지어 기뻐하는 듯 보였다. 이게 바로 반어법인가. 냉소인가.
예약을 왜 이렇게 했냐고 한 마디라도 하면 좋겠는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큰 그릇됨에 나는 깊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자가 내 옆에 살고 있다니. 이 정도면 결혼을 잘했지 라며 섣부른 판단까지 하기 이르렀다. 남편의 은혜로움에 힘입어 새벽 1시 비행기를 탈 때까지 잠든 2학년 딸내미를 내가 안고 있겠다며 최대한 나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애썼다. 그래, 머리가 나쁘면 몸이라도 써야지 하는 마음으로.
드디어 새벽 1시 넘어서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 이륙 전 시간이 남아 혹시나 하여 남편과의 카톡 대화를 찾아봤다. 몇 달 전 일이라 어떻게 비행기 예약을 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카톡 대화를 위로 올려보던 나는 한 가지를 발견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찾아보니 남편이 날짜를 잘못 지정해 놓은 결제 링크를 주며 결제하라고 지시했고, 나는 정말 결제만 했던 것이다.
오호라, 조용히 넘어간 이유가 있었구나?
고개를 들어 남편을 바라봤다. 그는 무사히 탑승했다는데 기쁨을 표현하며 엄지를 척 하니 들어 올렸다.
나도 이제는 매우 후련한 마음으로 쌍따봉을 날려주었다. 눈빛으로 메시지를 발사하며.
‘나는 네가 지난여름 보낸 링크를 알고 있다.’
가끔 내가 왜 저 인간하고 결혼했을까. 아니 내가 애초에 왜 결혼이라는 것을 했을까 가슴을 치곤 한다.
이 날은 확실히 알았다. 이 남자와 결혼한 이유를.
자칫하면 멀쩡해 보이는 우리 둘. 알고 보면 하루가 멀다 하고 덤벙거리고 실수 투성이인 부부.
그런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을 찾으며 위안을 하는 우리들. 참 잘 맞는 한쌍의 바퀴벌레... 아니 원앙 아닌지.
150만 원짜리 귀한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