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 기세등등퍼붓던 비가 지나가고 숨어 있던 해가 슬그머니 나왔다. 비 좀 그치라며 호통칠 땐 언제고 숨 막히듯 내리쬐는 태양을 흘겨보며 연신 손부채질하는나라는 인간간사하기 짝이 없다.
사무실에서 점심을 시켜 먹고 잔뜩부푼 배를 바지에 걸치고 호기롭게 산책에 나섰다. 오 분도 안되어 직장동료들과 고래를 절레절레하며 근처 커피숍으로 피신했다. 오늘만을 기다린 듯한 태양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커피숍에는 옆 건물에서 공사 중인 사람들이 에어컨 앞에 모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는 건설회사에 오랜 기간 몸담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쯤이었나 보다.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던 아빠는 홀연 경주 지역 현장으로 발령받아 떠났다. 그 후로 군산, 청양 등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일이 주에 한 번씩 집에 돌아왔다.
여름 장마 기간에 아빠는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빗물과 함께 공중에 떠다니는 사람 같았다. 공사 중인 구조물들이 무너지거나 헐벗은 산에서 토사가 흘러내리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몇 주만에 서울집에 온 아빠는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비상연락을 받고 5시간걸리는 현장으로 급히 돌아갔다. 일이 수습되면 처자식을 보겠다고 다시 서울로 오곤 했다.
한 번은 아빠가 군산에 있을 때였다. 장마 직후라 지친 아빠를 위해 엄마가 나와 오빠를 데리고 군산을 찾았다. 지역 주민만 안다는 간장게장집에 가서 단란하게 게를 뜯어먹는 중 현장에서 급하게 전화가 왔다. 일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 온 가족이 아빠를 따라나섰다. 허허벌판에 임시로 만든 컨테이너 사무실이 외로이 서있었다. 선풍기가 달달거리며 돌아가고 있었지만 사무실은 찜통이었다. 성냥갑 같은 사무실에 금방이라도 불이 붙어 버릴 것만 같았다.십 분도 안되어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불구덩이 같은 곳에서 아빠는 까만 재로 변해갔다. 집 한구석에 뽀얀 먼지를 끌어안고 있는 작은 액자 속 늠름한 남자는 얼굴이 허연 핸썸 보이였다. 언제부터 아빠는 사그라져 가고 있었을까.
친정집에는 에어컨이 없다. 한 대 주문해 드린다고 해도 손사래 친다. 웬만한 더위도 "이 정도는 껌이지." 하며 뻐긴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다. 눈을 지그시 감고 회상하듯 말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말이야" 하고 운을 뗀다. 가정집에서 느끼는 더위는 흙먼지 날리는 황량한 공사현장에 내리쬐는 더위에 비하면 빙하시대라며너스레를 떤다.
어른이 되어 밥벌이를 하면서 조금이나마 가늠해 본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무더위를 맞서는 용기에 대해. 하루에도 몇 번씩 흙을 걷어차며 그만하고 싶었을지. 가장의 무게에 짓눌려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아 흙 묻은 신발을 툭툭 털어내며 힘든 맘을 얼마나 털어내었을지.
아빠에게 더위가 아무렇지 않다는 사실이 이제야 나를 폭염처럼 덮친다.더 이상 사막 같은 현장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아빠의 얼굴은 하얘지지 않는다.
오늘자 더위를 느끼며 아빠의 지난한 시절에 손을 뻗어 본다. 단단하게 굳어버린 시간을 이제야 어루만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