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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Jul 25. 2023

섬뜩한 마주침

고3 겨울방학, 생애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친구 엄마가 아는 사람만 안다는 고수익 알바라며 소개해 주었다.  장소는 강남역에 위치한 설문조사 회사. 하루 종일 전화로 시청률이나, 정치선호도, 특정 상품에 대한 기대치 등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는 일이었다.

전화를 빨리 끊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정보를 캐내는 일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풋내기들이 하기에 녹록지는 않았다. 야근이나 주말 근무까지 하면 당시 인기였던 커피숍이나 패밀리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보다 시급이 2배 이상 세기에 참고 다녔다.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강남역까지 매일 9시까지 출근은 또 다른 난관이었다. 옷만 겨우 걸쳐 입고 지하철에 구겨져 실려가다시피 했다.


주말 근무를 신청한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부지런을 떨었더니 8시 반도 안 돼서 강남역에 도착했다. 친구와 강남역 지하상가에서 만나기로 했다. 주말이라 지하상가는 한산했고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점들이 대부분이었다. 겁 많은 쫄보지만 그리 이른 시간은 아니었기에 어둑한 상가 안을 별 의심 없이 걸어 다녔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인적 드문 곳을 지날 때 웬 남자가 옆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저.. 저기요."

선량하게 말을 거는 젊은 남자 모습에 긴장을 풀었다.

3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그는 통통한 몸매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차콜색 양복바지와 짧은 감색 코트를 차려입었다. 뺀질한 검정 구두가 눈에 띄었다. 옆으로 메는 큼지막한 회색 노트북 가방을 껴안듯 메고 있었다. 회사원 같았으나 살짝 헝클어진 머리에 땀범벅인 모습이 어딘가 어설픈 남자였다.

"네?"

남자는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저.. 괜찮으시면...

.

.

.

.

.

.

.

저랑 노래방 가주실 수 있을까요?"

심장이 멎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저...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손만 잡을게요. 진짜예요."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뿔테 안경 속 그의 눈은 탁한 유리구슬 같아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미친... 놈이잖아?' 

주위에 지나가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젠장,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1초... 2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무 말이나 튀어나왔다.

"아니에요!!"

말을 내뱉자마자 그를 지나쳐 앞으로 경보하듯 빠르게 걸었다. 냅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뛸 수 없었다. 발가락부터 머리털 끝까지 떨고 있는 모습을 들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공포영화를 보면 꼭 뒤돌아볼 때 사달이 났다.


그의 검은 구두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따박따박

저벅저벅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엄마!!!!!!! 살려줘!!!!!'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를 겨우 삼켰다.


매일 가는 곳이지만 출구는 늘 헷갈렸다.

걸어가는 길 끝에 제발 출구가 나타나길 빌고 또 빌었다. 

'앞으로 엄마아빠 말씀 잘 듣고 오빠랑도 안 싸울게요. 아르바이트비 다 나눠 쓸게요. 제발 도와주세요. 흑흑'

친구 만난다고 지난주 성당을 빼먹은 게 후회되었다. 울면 안 되는데 눈물이 제멋대로 흘러내렸다.

 

그 와중에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저 자식이 혹시 따라와 내 어깨를 잡는다면 확 밀치고 소리를 지르며 뛰자. 아니다, 무조건 뛰자.'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빛이 새어 나오는 출구를 찾았다. 계단을 두 개 세 개씩 마구 올랐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라 마지막 계단은 거의 네 발로 기었다. 그는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마침내 출구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눈앞에 보이는 행인들이 모두 가족 같았다.  곧 강남에 도착할 친구에게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해맑게 전화를 받으며 "어 나 다와가~" 하는 친구에게 울음을 쏟아냈다.

울먹이며 친구에게 한 정거장 먼저 내리라고 했다.

거기서 버스를 타고 오라고. 그 자식이 아직도 지하철역에 있을 거라고.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에게 기가 허하다는 말을 숫하게 듣고 자랐다.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가위에 눌렸다. 보통 귀신, 유령,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물체가 꿈속의 나를 짓눌렀다. 귀신이 무섭다며 엄마를 붙잡고 엉엉 울곤 했다.

그날 이후, 상상 속의 귀신이나 유령이 아니라 사람이 제일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위눌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현실적인 고통이 따를 수 있다는 것도.


그렇게 나의 첫 아르바이트는 끝이 났다. 한동안 강남역에는 갈 수가 없었다.




지난 21일 신림동에서 끔찍한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했다. 연일 터지는 강력 범죄 뉴스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기후대책, 동물 보호, 환경오염 등 사회 여러 문제들을 접할 때마다 미미하지만 보탤 수 있는 작은 실천이 바로 떠오른다. 인간이 저지르는 악한 일들은 개인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주변을 살피고 또 살피는 일. 호신용품을 구입하는 일. 아이들을 조심시키는 일.

아파트 화단 한 구석에 집을 파놓고 쉼 없이 먹이를 나르는 개미들이 있다. 작고 검은 생명체는 손쓸 틈도 없이 자동차 바퀴에 인간의 발걸음에 무자비하게 밟히곤 한다. 인간의 삶이라고 크게 다를까 싶다.  


헌법 제10조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졌는가. 안전하게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를 헤매는 것처럼 오늘도 두려워하며 하루를 사는 우리들은 치열하게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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