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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May 15. 2024

대용량을 사랑한 사나이

365일 다이어트를 외치면서도 왜 매일 먹고 싶은 것이 생기고 마는 것인지. 일요일 오후, 아이들과 들른 도서관에서 요리책이 한가득 꽂혀 있는 서가에 저절로 발이 멈추었다. 생각 없이 꺼내든 책 첫 표지에 나온 태국음식 얌운센을 보자마자 꽂혀버렸다. 오늘 저녁 메뉴는 너로 정했다! 아이들을 먼저 집으로 보내고 집 앞 마트에 가서 양손 가득히 장을 봤다. 각종 야채와 피시소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고수. 얌운센을 싫어할 수 있는 아이들을 위해 카레 재료까지 낑낑거리며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재료를 다듬다 갑자기 떠올랐다. 아뿔싸. 다진 마늘을 안 사 왔구나. 얌운센 소스에 마늘이 들어가야 알싸한 맛이 추가될 텐데. 버스 놓친 사람처럼 발만 동동 구르다 잠깐 집 앞에 나간 남편을 떠올렸다. 핸드폰을 들고 사 오라고 할까 말까 망설였다.


망설이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요리라고는 냉동밥 데우기와 계란 프라이가 다인 그에게 장보기란 수학의 미적분 문제 같다고나 할까. 그의 전적은 화려하다.


첫째가 태어난 직후였다. 조리원 퇴소 후 산후조리사 여사님이 몇 주간 와계셨다. 인터넷 장보기가 활성화된 시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몸조리 중인 내가 직접 장을 볼 수 없으니 여사님이 재료를 종이에 적어 남편에게 장을 봐와 달라 부탁했다. 차로 왕복 20분 거리인 중형마트에 갔는데 남편은 1시간이 훌쩍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반찬을 잔뜩 해놓고 퇴근할 생각에 마음이 분주했던 여사님은 남편에게 계속 전화해 보라고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할 무렵, 남편은 2시간 만에 돌아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냐는 두 여자의 물음에 남편은 거의 모든 식재료의 위치와 물건 종류, 사이즈를 일일이 물어보느라 늦었다고 했다. 그 후로 장은 내가 봤다.


몇 년이 흘러 첫째가 세 살이 되었고, 어른들과 같은 음식을 먹긴 하지만 새 모이만큼 먹던 시절이었다. 카레 요리 중이었는데 가장 중요한 카레 분말 가루가 똑 떨어진 것을 늦게야 깨달았다. 남편에게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남편 손에는 1kg짜리 카레 가루가 들려있었다. 무기인가? 가게를 차릴 태세인가. 이때까지만 해도 빵 터지며 박장대소를 하고 넘어갔다. 물론 카레는 2년 남짓 되는 유통기한이 지나도록 다 먹지 못하고 버렸다. 나는 최선을 다해 스스로 장을 봤다.


둘째가 태어나고 또 몇 해가 흘렀다. 아이 감기 기운이 심상치 않더니 역시나 하루 종일 밥을 잘 넘기지 못했다. 둘째가 가장 좋아하는 미역국을 급히 해주기 위해 건조 미역을 사다 달라 부탁했다. 미역은 사기 어려운 재료가 아니라고 긍정 회로를 돌리며. 또다시 잠시 후 들어온(이제는 빨리 와도 무섭다) 남편은 무슨 거문고를 어깨에 이고 지고 왔다. 산모 미역이었다. 동네 마트에서 저걸 어떻게 구한 건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아직 산모니?”

남편은 해맑게 답했다.

“클수록 좋은 거 같아서.”

이번에는 박장대소까진 할 수 없었다. 아이들 키보다 더 큰 산모 미역과 씨름하며 잘게 잘라 미역국을 만들고, 덩치 큰 녀석을 수납할 공간이 없어 봉지마다 소분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들었다. 앞으로는 장을 반드시 나만이 볼 것이다. 다시 다짐했다.


그렇기에 다진 마늘 하나에도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남편을 탐구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던가. 다진 마늘을 사다 달라 전화했다. 요리에 정신없는 사이 둘째가 남편이 장 봐온 봉지를 열어 착하게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야?”

1kg짜리 다진 마늘이었다. 왜 이렇게 큰걸 사 왔어? 코스트코 간 거 아니지? 작은 거 못 봤어? 남편은 옆에 있지도 않은데 혼자 질문을 쏟아내고 있었다. 십수 년째 대기업에서 나온 작은 크기 다진 마늘을 사용하고 있다. 식재료 쟁이는 것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집 앞 마트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잘 띄는 선반에 작은 용기에 들은 다진 마늘과 두부, 어묵 등 인기 식재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집 근처에 식당이 많아 업소들을 위한 대용량 식재료를 한곳에 모아 놓고 파는데 거기에서 집어 온 것이 아닌가 싶다. 남편은 항변했다. ‘명확한 지시’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어느 회사 걸로 사야 하는지 어떤 크기로 사야 하는지 정확하게 지시를 해야 한다며 아이들까지 불러다 '명확한 지시! 명확한 지시!!' 라고 떼창을 불렀다.


아, 그랬구나. 명확한 지시가 없었구나. 남편 탐구 일지에 써야겠다.

<명확한 지시가 필요함>

다음부터는 이렇게 말해줘야겠다.

오뚜기 케첩 500g짜리, 저당 케첩이 아니고, 1/2 하프 케첩 아니고, 과일과 야채 케첩 아니고, 업소용 3.3kg 아닌 진한 케첩이라고 쓰인 것으로 사 오고. 두부는 두 개짜리 붙은 국산콩 풀무원 두부로 사 오고, 두 개 붙은 게 없으면 그냥 하나짜리 찌개용으로 사 와줘. 참치는 동원참치로 사다 주되 크기는 가장 큰 걸로… 아, 아니다. 큰 거 사 오라고 하면 대용량 업소용 3kg를 사 올 수도 있으니 150g짜리로 사 와. 없으면 85g짜리도 괜찮아.


결혼 전까지 다니던 성당에서 미사 때마다 하던 기도가 떠올랐다.

‘(가슴을 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저의 큰 탓이옵니다.’

그동안 명확한 지시를 내리지 못한 나를 탓해보며 다진 마늘을 소분해 본다. 왜 눈물이 나지. 매운 마늘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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