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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May 30. 2024

내가 변기를 닦게 될 상인가


한 달 전부터 남편이 자꾸 화장실에서 냄새가 난다고 했다. 우리 집 화장실에 냄새난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는 결혼 후 한 번도 제대로 화장실 청소를 해본 적이 없다. 이 글을 읽는다면 발끈하겠지. 한.번.도. 안 한 건 아니라고. 아마 명절마다 바닥에 물 정도는 뿌렸을 것이고 화장실 수납장 두세 번은 정리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화장실 청소의 기준은 솔을 들고 세제를 뿌려 바닥이나 세면대를 문질러 봤는 지다. 나라는 인간도 깨끗한 편이 아니고 뒤돌면 어지럽히는 애 둘 키우며 출근하느라 더러운 화장실은 질끈 감는 편이다. 분홍색, 검은색 곰팡이가 땅따먹기를 시작하고 바닥에 아이들이 헨젤과 그레텔처럼 흘리고 간 과자 부스러기, 먼지가 모여 존재감을 드러내면 청소를 결심한다. 호텔처럼 깨끗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화장실 청소는 꽤 힘에 부친다. 한 번은 혼자 치운다는 사실이 유난히 슬퍼져 장을 보러 나가며 남편에게 미션을 내렸다. 오늘은 반드시 솔을 들고 화장실 청소를 하라고. 잠시 후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독한 화장실 청소 세제를 뿌려 바닥을 문지르고 있었다. 아, 인간아…


이런 사연이 있기에 남편이 화장실 냄새 운운할 때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대했다. 그는 날이 갈수록 더욱 괴로워했다. 급기야 하수구 뚜껑을 들어내고 청소하기 시작했다. 처음 본 광경에 흠칫 놀랐다. 하루는 시어머님 조언에 따라 펑 뚫어준다는 배수구 세정제를 사 오더니 화장실 이곳저곳에 부지런히 부어댔다. 금쪽같은 내 남편 프로그램이라도 신설해 내보내야 할 정도의 열성이었다. 그의 생애 첫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냄새 때문에 두통까지 호소하던 남편은 급기야 화장실 냄새 전문가를 부르기에 이르렀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내 코는 잠잠했다. 뭔가 냄새가 나긴 했으나 우리 집 화장실에서 꽃향기가 난 적은 없지 않은가. 큰 키에 모자를 푹 눌러쓴 전문가는 믿음직스럽게 의심 가는 구멍들을 재빠르게 확인하고 트랩을 설치한다고 했다. 쥐 잡는 트랩 같은 거요? 알고 보니 냄새를 차단하는 트랩이 있다고 한다.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후 남편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전문가란.


기쁨도 잠시, 몇 시간 뒤 다시 냄새가 난다며 남편이 울상 지었다.

무려 16만 원이나 돈을 써가며 전문가를 불렀지만 성과가 없자 남편은 절망의 심연에 빠졌다.

그날 저녁 첫째 아이 방에서 공부를 봐주고 있었다.

사각사각, 쓰윽쓰윽

빠르게 칼 가는 소리가 화장실에서 들려왔다. 가까이 가보니 남편이 씩씩거리며 솔을 쥐고 변기를 닦고 있었다. 둘째가 쪼르르 달려와 상황을 보고 했다. 아빠가 변기 닦았어! 아이도 신기했는지 1열 관람 중이었다. 불꽃 축제라도 열어야 할 판이다. 결혼 15년 만에 변기 청소를 하다니. 아마도 그의 인생 통틀어서 처음 닦는 변기일 것이므로 더욱 의미 있다. 어릴 적 배운 민요가 절로 나온다. 쾌지나 칭칭 나네~~


사람들은 나에게 충고하곤 했다. 남편이 집안일하도록 하려면 칭찬을 계속해주라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은 엇나간 심정이 되곤 했다. 살림을 같이하는 건 당연한데 왜 남편에게는 칭찬을 해줘야 하지? 억지 칭찬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자주는 못하겠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퍽 진심도 아닌 말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과, 칭찬효력도 벚꽃처럼 빠르게 져버리곤 했으니까.


부부 나이 합쳐 구십 살 가까이 되니 그도 나도 드디어 철이 드는 건가. 오래간만에 집안일하는 인간을 칭찬하고 싶어졌다.

“아이고, 잘했네. 잘했어. 저기 안방 화장실 변기도 좀 해봐. 내가 팔심이 없어서 잘 안되더라고.”

칭찬은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른 남편도 춤추게 한다. 그는 ‘내가 왕이 될 상인가’의 발걸음으로 안방 화장실을 향해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지 않을까.

내가 변기를 닦게 될 상인가


힘차게 두 번째 변기를 닦는 그의 뒷모습에서 과연 하늘의 명을 받은 자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어제는 그가 쓰게 될 변기 솔을 새로 주문했다. 리본을 달아 줄까. 자꾸 도구를 손에 쥐어 주고 싶다. 오늘은 독하지 않다는 청소 세제를 장바구니에 담아 본다. 자기,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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