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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봉 Jul 05. 2024

숙취를 풀어드립니다

남편이 금요일 저녁 술 약속을 잡았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큰 후로는 남편의 약속이 반갑다. 그래야 나도 합법적(?)으로 나가 놀 수 있다는 생각에 온 맘으로 축복하며 그를 내보낸다. 평소 자기 관리 능력이 나의 5배 정도 되기에 필름이 끊겨 버스 정류장에서 대자로 뻗어 잘 가능성이 매우 낮은 사람이다. 편하게 먼저 잠들어도 되었겠지만 이 날은 모처럼 아이들이 빨리 잠들었다. 혼자만의 밤시간을 달콤하게 즐기다 보니 어느새 2시가 훌쩍 넘었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지만 조금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남편은 술 약속 있는 나를 탐탁지 않아 한다. 그렇다고 내가 필름이 끊겨서 행인에 의해 발견되거나 네 발로 기어 들어오거나 귀가 후 변기와 뽀뽀하는 일은 결혼 후 단 한 번도 없다. 이불 킥하게 만드는 내 인생의 명장면들은 다행히도 결혼 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전적인 힘을 받아 술이 약하지 않은 편이고, 아이를 낳은 후로는 더욱더 정신력을 발휘해 심하게 취하지 않으려 애쓴다.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내가 술약속만 있으면 "언제 와" 문자를 끊임없이 보내고, 자정도 안되었는데 좀만 늦어진다 싶으면 "너무 늦네."라고 압박 메시지를 보낸다. 보통 약속은 서울에 있기에 집에 오는데 거의 2시간을 잡아야 하므로 아무리 늦어도 10시면 신데렐라처럼 일어서는 나를 두고 말이다. 지인들은 말한다. "남편이 아내를 너무 사랑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처럼 사랑이 넘치는 가정으로 포장하고 싶지만, 메시지 폭격을 한 후 그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잠들어 버리거나 아무리 늦게 와도 집 앞으로 데리러 온 적은 신혼 시절부터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


어느덧 3시가 되었다. '삑삑삑' 도어록 기계음이 적막한 새벽 공기를 눈치 없이 가로지르며 울렸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은 귀신이라도 보는 양 기절하려고 했다. “나는 다들 잘 줄 알고 일부러 연락 안 했어.” 그가 멋쩍게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일랑 접어 두라는 손짓으로 나는 석가모니의 자애로운 미소를 내뿜었다. “애들은 잘 잤고, 난 그냥 유튜브보다 안 자고 있었어. 어서 씻고 와서 쉬어.” 화장실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위태하게 흔들렸다. 오호라. 내일 그의 운명이 점쳐지는 순간이었다.


늦게 잠든 탓에 9시까지 개운하게 자고 일어났는데 남편은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이불과 한 몸이 되어 끙끙거리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보이는 그의 숙취에 왠지 모를 반가움이 일었다. 나는 다 계획이 있었다. 서랍 속 깊은 곳에 쟁여둔 숙취해소제와 유비무환으로 한 박스 사다둔 헛개수 음료를 들고 그에게 다가가 내밀었다. 이런 게 갑자기 어디서 생겼냐며 물었지만 난 대답 대신 멋지게 병뚜껑을 따주었다. 오래간만에 나를 꽤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그 눈빛은 넣어둬. 아직 끝이 아니야. 눈곱도 안 떼고 바로 북엇국 끓이기에 돌입했다. 마침 콩나물까지 있었다. 하늘은 나를 돕는구나. 한 사발 시원하게 끓여 쟁반에 놓고 방바닥과 물아일체가 된 그에게 가져다 바쳤다. 후루룩 마시더니 다시 돌아누웠다. 난 그에게 지령을 내렸다. “숙취해소 삼총사 알지? 해장했으니 좀 이따 화장실 다녀오고 샤워하고 그럼 좀 나아질 거야. 하지만 기억해. 이 정도로 심한 날은 신이 당신을 5시쯤에서야 살려주실 거야. 그때까지 누워있어. 난 애들 데리고 나갔다 올게.” 그리곤 망설임 없이 뒤돌아 문을 닫고 나왔다. 남편은 앞으로 몇 시간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을 것이다.  아빠 어디 가 아프냐는 아이들에게는 몸살이 났으니 쉬게 해 주자며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한참 후, 집에 돌아온 우리는 신이 살려준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남편은 약속을 평일에 잡곤 했다. 직장이 멀기 때문에 그런 날은 근처에서 잠을 자고 바로 회사로 출근하는 것이 합법적으로 용인되었다. 술 먹고 몇 시에 들어가는지, 얼마나 마시는지 같은 건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사정으로 우리 집에서는 아주 가끔 술약속이 있지만 무조건 집에 돌아와야 하는 나만 천하의 술꾼이 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오래간만에 금요일 저녁 약속이 생긴 남편이 드디어 술 먹은 자태를 뽐낼 기회를 가졌고 마침(?) 술병에 걸렸다.


술 먹고 내가 조금이라도 괴로워할라치면 그러니까 왜 그렇게 술을 먹냐고 혀를 차던 남편으로부터 만능쿠폰 한 장 받은 느낌이다. 남편의 지인들에게 문자 한 번 날리고 싶다. 이왕이면 금요일 저녁으로 약속을 잡아 주세요. 그의 건강을 해치는 정도가 아니라면 난 얼마든지 내 서랍 속 숙취 해소제와 헛개수 음료를 친히 챙겨줄 의향이 있다. 그것도 아주 기쁘게.


내가 그릇을 깨거나 음료수를 따르다 흘릴 때 아이들은 손뼉 치고 반긴다. 엄마도 자기들처럼 자꾸 뭘 흘리고 깨뜨린다면서. 오래간만에 숙취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남편에게서 인간의 냄새를 킁킁 맡으며 나도 조만간 당당하게 약속을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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