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너무 개운하다..?

부디 그 베개에 머리를 대지 마오

by 글쓰는 PD

그런 적 있는가?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개운한 기분.

햇살이 너무나도 따사롭고 오늘이 며칠인지, 지금이 아침인지 점심인지 낮인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그 기분. 부재중 전화가 대략 60통 가까이 와있다면 완성이다.


사건의 발단은 VCR을 맡았던 선배가 갑작스레 일을 그만둔 것부터였다.

인테리어 관련 아이템을 진행하고 있었고 한 회차에 들어가야 할 VCR만 다섯 개였다. 촬영은 1/3쯤 진행됐고, 방송이 며칠 안 남은 상황이었다. 갑작스레 선배가 그만뒀다. VCR 다섯 개는 고스란히 내게 넘어왔다.


씁씁후후- 심호흡부터 하고.

셀프 인테리어를 하는 집이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과정을 방송 전까지 담아 편집하고 후반 작업을 하려면 난 현장 연출뿐만 아니라 벽에 페인트칠부터 도와야 했다. 단순 칠 작업을 돕고 이 방에 있는 물건을 저 방으로, 저 방 페인트칠할 땐 또 옆 방으로 짐을 들고 나르며 공간이 생기는 곳부터 촬영을 해댔고, 아이 방 문짝에 칠판 시트지를 붙이려다 본드 냄새에 헛구역질까지 했더랬다. 출연자가 작업을 마무리하는 동안 아이가 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인형 놀이를 같이 해주는 걸 마지막으로 완성된 집 스케치 촬영을 마저 하고 회사로 복귀했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하지만 방송국은 무적 파워레인저들이 득실대는 곳이다. 아프기 금지다. 바로 미리 찍어둔 것부터 편집에 들어갔다. 촬영 3일 뒤 아침이 종편이었다. 촉박한 방송 및 촬영 일정 때문에 VCR만 끼워 넣도록 나머지 작업은 미리 되어있는 상태라 종편을 미룰 수도 없었다. VCR 다섯 개를 이틀 만에 편집해야 했다. 마지막 촬영 당일부터 시작해서 3일 밤을 총 두 시간만 자고 버텼다. 아마도 의자에 기대어 매일 30분 정도씩 잤던 것 같다. 컨디션 최상으로 밤을 새도 힘든데, 촬영 날 맡은 본드와 페인트 냄새가 어지간히도 오래 괴롭혔다.


나는 편집이 빠른 편이다. 잘 몰랐는데 내가 빠르더라. 가편에 가자막까지 올려가며 하나가 완성되는 족족 작가님께 토스했고, 자막 팩트체크를 받고 곧바로 종편실로 뛰어갔다. 새벽 4시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기하고 있던 감독님이 재빨리 받아 CG 작업을 해줬고, 나는 신들린 듯이 자막을 넣었다. 4일간의 미친 일정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종편을 마친 테이프를 품에 안고 믹싱실로 가는 길이 무척이나 상쾌했던 기억이 난다.

아... 이제 믹싱만 하면 끝이다.

테이프 믹싱실에 맡기고, 음악 감독님이 작업하시는 동안 나는 집에 가서 이 드러운 몸을 잠깐 씻고 나와서 오후 2시에 다음 회차 아이템 회의하고, 오후 3시에 마무리 믹싱 하면 끝!

너무나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믹싱실에 테이프를 넘기고 집으로 갔다. 아마도 아침 아홉 시 반쯤 되었을까. 택시를 타고 집에 가는 동안 내리쬐는 햇살이 반짝반짝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한 후부터 기억이 없다.


눈을 떴을 땐 집 천장이 보였고, 잠시 고민했다.

'오늘이 며칠이지?'

'지금은 아침인가?'

'나 지금 여기 있어도 되나?'


핸드폰을 보자 육성으로 비명이 터졌다. 부재중 전화 59통. 그리고 3시 30분.

'뭐지? 새벽인가?'

아니. 오후 3시 30분. 즉 메인 선배와 함께 해야 했던 아이템 회의는 이미 지나갔고, 믹싱은 나를 빼놓고 진행 중.

너무 황당해서 눈물도 안 났던 것 같다. 당황하지 않고 옷을 챙겨 입고 눈곱을 떼고 회사로 향했다. 그 와중에 가장 무서웠던 건 다른 피디들의 수십 통 되는 전화보다 메인 선배의 전화 단 2 통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말이지 정제된 2통.


웃음이 났다. 지금껏 큰 실수 한 번 없었던 내가 뭐 이런 개운한 사고를 쳤지?

회사에 도착하자 메인 선배가 손에 테이프를 들고 믹싱실에서 걸어 나오고 계셨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선배는 조용히 피디들을 집합시켰고, 정신 안 차리냐고 다 함께 혼났다.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근데 진짜 죄송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도 황당한 일이었다. 해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사람이 3일 밤을 두 시간만 자면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게 되는데, 아마 나도 모르게 베개에 머리를 디밀었던 모양이다.


자고로 믹싱은 한 회 방송을 제작하는데 들인 그 모든 공력을 최종적으로 내 눈으로 확인하고 마무리해야 하는 신성한 작업이거늘. 그걸 놓쳤다. 방송일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호되게 혼난 날이었다. 테이프를 입고하고 메인 선배가 계신 편집실에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선배님 죄송해요. 허허."

그제야 선배는 웃으며 "아냐. 나도 예전에 밤새고 잠들어서 다른 피디가 집 주소 찾아서 우리 집 문을 두드린 적도 있었어." 라며 상당히 위로가 되는 말씀을 해주셨고, 앞으로 주의하겠다고 인사드리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방송은 시청률이 매우 잘 나왔다.

정말이지 몸을 갈아 만든 방송이었더랬다. 그리고 조금은 자신감이 생겼던 회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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