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PD의 짠내 나는 방송국 생존기
4,5,6 연차 때는 그야말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닥치는 대로 일했고, 욕심쟁이처럼 일을 떼와서 했다. 내 연차가 낮다고 곤조를 부리는 연차 높은 감독님을 어르고 달래 가며 촬영했고, 갑자기 그만둔 선배의 몫을 오롯이 다 떠안아도 군말 없이 버텼다.
"이 부분 제가 좀 해볼까요? 헤헷"
다른 건 몰라도 편집 욕심을 엄청나게 냈던 시기다. 사나흘을 30분씩 밖에 못 잤지만, 이걸 해내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의 경험이 스스로를 많이 성장시켰다고 믿는다.
프로그램을 옮겨 다니다 보면 정말 다양한 선배들을 경험한다. 운이 좋게도 롤모델 삼고 싶은 선배들도 만났지만 (안타깝게도 많진 않다) '대체 저 선배는 왜 그럴까?' 싶은 선배들도 있었다. 내가 겪었던 선배들 중 가장 악질로 꼽는 유형은 '다 너를 위해서야' 라며 일을 떠넘기는 선배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선배였다.
종합구성물 프로그램을 할 때였다. 유난히 내게 심술을 부리던 선배가 있었는데, 내가 맡아 편집하고 있는 구다리와 똑같은 부분을 후배에게도 편집을 시켜둔 거다. 도대체 왜 같은 부분을 굳이 두 명에게 시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더랬다. 그래도 열심히 편집했고 컨펌을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양가 있는 피드백은 별로 안 주더니 "OO이 꺼 편집 잘했더라" 라며 뜬금없이 같은 부분을 편집한 후배를 칭찬하는 게 아닌가?
무척이나 자존심이 상했다. 그 '잘했다'는 편집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해 선배에게 그 편집본을 보여달라고 말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지웠다 ㅎ"였다.
지웠다니?
보고 공부할 수도 없는 유령 같은 편집본을 내 편집본과 비교하면서 기를 죽이려는 말들을 늘어놓고는 지웠다니? 이 무슨 심술인가. 한창 악으로 깡으로 빡센 스케줄을 버틸 때였고, 그 선배의 말은 빵빵하게 부푼 내 풍선을 펑 터뜨리는 말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을 해놓고 그날 밤 서버를 이 잡듯 뒤졌다. 저장본이 남아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생각보다 수월하게 저장본을 찾아냈고 그 '잘했다'는 편집본을 확인한 결과 웃음만 나왔다. 완전히 완성되지 않은 가편이었다. 15분 분량으로 만들어야 하는 내용이 30분이 넘게 붙어있었고, 편집을 했다고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잘못 열었나? 해서 더 찾아봤지만 시퀀스에는 'OO선배 확인용'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쓰여 있었다.
왜 그랬을까.
내 오기를 자극해 더 열심히 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단순한 심술이었을까.
아직도 선배의 의중은 알지 못한다. 그 사건 이후 선배는 작가님들과 다른 선후배들 앞에서 날 '쟤 엄청 독해'라고 웃으며 돌려깠고, 나는 그 앞에서 뭐 독하게 일하는 게 마냥 욕은 아니지 라며 웃어 넘겼더랬다.
결국 내 편집본이 최종본으로 방송에 나갔다. 도움이 되는 피드백은 언제든지 환영이다. 확실한 방향성을 가지고 마구 까는 것도 환영이다. 정말로 참고할만한 좋은 편집본을 보라며 야단하는 것도 대환영이었다. 말씀하셨듯 '독하게' 보고 배울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건을 통해 앞으로 나는 절대로 후배들의 편집본을 놓고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더랬다.
서울에 올라와 버틴 지 1년이 조금 못되던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