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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에 흔들린 꽃들 Apr 24. 2023

체념의 구슬

그렇게 사라져 간 사람들

“서울의 한 재건축 공사현장에서 정체불명의 구슬이 나타난 건 어제 오후 4시경이었습니다. 최초 발견자인 공사장 인부는 굴착작업 중 단단한 물체가 땅 밑에서 감지되어 삽으로 주변 흙을 퍼내자 구슬이 떠올랐다고 진술했습니다. 직경 2미터가량의 구슬은 육안으로 봤을 때 거의 완벽한 구의 형태로 현재까지도 지면으로부터 건물 1층 높이에 떠있는 상태입니다.”


뉴스 속 구슬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초록빛에 붉은색이 섞인 장난감 유리구슬과 거의 일치하는 모습으로 크기만 커진 형태였다. 그렇게 공중부양 중인 구슬을 에워싼 수많은 시민들과 기자들을 힘겹게 통제하는 경찰들의 모습도 텔레비전 속에 비쳤다.



거대한 구슬의 등장 이후 며칠 동안 방송사들은 앞다투어 현장보도에 열을 올렸다. 그중엔 외신기자들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이 사안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큰 관심을 받고 있는지를 반증했다. 현대과학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그 인기는 일주일이 넘어가면서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충격적인 첫 등장에 부합하지 못한 지지부진한 구슬의 다음 행보 때문이었다.


현장이 통제된 이후 관계자들은 구슬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아내려 했다. 우주복 같은 차림새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방사능 수치를 측정한 뒤 표면을 긁어내 샘플을 채취하려 했으나 무위로 끝나는 듯 보였다. 그다음으로 그들은 중장비를 이용해 구슬을 옮기는 시도를 했다. 구슬의 표면에 맞닿은 거친 쇠사슬과 벨트는 구슬에 아무런 흠집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중장비의 엔진이 짙은 연기를 내뿜으며 사력을 다해도 구슬은 어느 지점을 끝으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한계점까지만 늘어나는 고무줄처럼 구슬을 당길수록 중장비는 더 큰 힘을 쏟아야 했고, 힘을 빼면 구슬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스르륵 제자리로 돌아갔다. 모든 방향에서 이뤄진 똑같은 시도는 구슬이 대략 직경 10미터 정도의 보이지 않는 구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 모든 과정은 철저한 통제 아래 진행됐으나 시민들과 기자들이 날린 드론에 의해 만천하에 중계되고 있었다.


몇 주가 지나자 구슬을 보러 오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간식을 파는 노점상만 늘어갈 뿐 구슬에 대한 조사에는 그 어떤 진척도 없었다. 한 달이 넘어가자 눈에 띄게 적어진 관광객을 대신 한 건 시위대였다. 건물이 새로 지어지면 입주가 예정된 사람들을 비롯해 재건축에 이권이 걸린 온갖 단체들이 합을 맞춰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몇몇 방송사들은 이 모든 상황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서 시민들에게 다시 한번 구슬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구했다. 구슬의 성분조차 모르는 상황을 고려해 군사 무기를 통해 구슬을 제거하는 방법은 위험하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그들은 구슬이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을 피해 건물을 올리는 방법을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뽑았다. 그로써 건설사는 수정된 도면을 바탕으로 몇 달 만에 공사를 재개했다. 하루가 다르게 완성되는 구조물 사이로 구슬은 시야에서 사라져 갔고, 크고 작은 법적 분쟁 또한 하나둘씩 해결되어 갔다. 그렇게 구슬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듯했다.


구슬이 갑자기 사라진 건 정부의 보상안에 만족한 시위대가 완전히 해산하고 며칠이 지난 뒤였다. 그날 오후 구슬은 여전히 둥둥 뜬 채로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을 것처럼 꿈쩍도 않고 있었다. 그냥 그 자리에 존재할 수만 있게 해 달라는 듯 말없이 햇빛만 반사하던 그때, 구슬은 갑자기 밝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이내 구슬의 본래 모습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의 하얀빛이 공사현장을 덮쳤고, 그것은 그 누구도 감히 쳐다볼 수 없는 눈부신 빛의 덩어리로 돌변했다. 그렇게 10초 정도 빛을 발산한 뒤 구슬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은 채, 구슬은 영원히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그날 뉴스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서울의 한 지하철 역에서 시신이 발견돼 경찰이 조사 중에 있습니다. 신원이 파악되지 않은 사망자가 그동안 노숙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주변 노숙인들은 그가 재건축으로 갈 곳을 잃어 길거리 생활을 시작했다는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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