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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에 흔들린 꽃들 May 02. 2023

우리가 헤어진 계절

나쁜 순간도 좋은 순간으로

"누구시죠?"라고 수화기 너머로 여자가 물었다. 나는 그 한마디로도 그녀가 오래전 헤어진 여자 친구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목소리는 왜 시간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일까? 쓸데없는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나야." 하고 대답하자 저편은 조용해졌다. 먼 우주에서 보내오는 신호처럼 미세한 잡음만이 들려왔다.

"너구나."라며 그녀 역시 단번에 나임을 알아차렸다. 이쯤 되니 우리 사이에 변하지 않은 목소리 그 이상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 없어.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음을 확신하고 헤어졌으니까.

"무슨 일이야?"라는 그녀의 질문에 반가움 따윈 없었다. 약간의 걱정이라면 모를까. 수년 전 헤어진 연인이 갑자기 전화를 걸 만한 이유는 함께 알던 누군가 죽었다거나 하는 안 좋은 소식뿐일 테고, 그녀 역시 나로부터 예상치 못한 연락을 받고서 그런 류의 사건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게 말야, 그러니까... 우리가 헤어졌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나?"

나의 질문에 그녀는 헛웃음인지 기침인지 모를 짧은 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그걸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야? 십일 년 만에?"라고 말한 뒤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건 확실히 기침이 아닌 웃음이었다. 정말 웃겨서 웃는 웃음.

"응. 진지하게 궁금해. 너무 알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오죽하면 내가 너한테 전화를 했겠어?"

"그게 왜 궁금한데? 이제 와서 왜?"

"나도 몰라. 우습게 들리겠지만 며칠 전에 바람이 부는데 갑자기 궁금해졌어. 따뜻하다고 하면 따뜻하고 차갑다고 하면 차가운 흔한 봄바람을 맞는데 생각난 거야. 우리가 헤어졌던 그날이. 그리고 그 순간엔 우리가 봄에 헤어졌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말야, 집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날이 가을이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예상대로 그녀는 한바탕 크게 웃고서 "넌 예나 지금이나 엉뚱하네. 도대체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라며 되물었다.

"그냥 대답 좀 해 줘. 우리가 헤어졌던 계절이 봄이었어? 아니면 가을? 정말 기억이 나질 않아."

드문드문 이어지던 웃음이 완전히 멈추고 저편은 다시 우주처럼 조용해졌다. 이토록 황당한 이유로 무려 십일 년 만에 전화를 걸어온 전 남자 친구에게 다른 불손한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고, 그녀는 의심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의도 같은 건 없이 나에겐 딱 하나의 궁금증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게 희한하네. 나도 그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 모르겠어. 너랑 꽤 오랫동안 사귀었는데 왜 헤어진 때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까?"

다행히 그녀 역시 나의 진심을 알아준 모양인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녀 쪽에서도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지만.

"둘 중 하나라면 나는 봄이었던 것 같아." 하고 내가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아니야, 분명 가을이었어. 그때 날씨가 아직 좀 따뜻했고 바람은 약간 쌀쌀했거든."

"확실해? 그때 벚꽃이 피던 시기였던 거 같은데."

"코스모스를 벚꽃으로 착각하는 건 아니고?"

우리는 어느 한쪽에 동의하지 못한 채 논쟁하듯 대화를 이어갔다. 어느 계절이었든 우리가 헤어진 그날은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있었고 공기는 따뜻했다. 우리는 그런 좋은 날에 헤어졌던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기억 속에선.




남자와 여자는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고 있다. 한때는 사랑으로 가득했던 서로의 얼굴에는 이제 텅 빈 표정만 드리워져 있다. 둘 사이에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미움도 남아 있지 않기에 두 사람은 헤어지기로 한다. 거리엔 하얀 눈이 내리고 있다. 회색빛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은 거센 바람에 흩날리며 이제는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발자국을 지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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