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당신에게 이미 시그널을 보냈다
"이 대리는 확실히 달라. 내가 몇번 봤는데 아이디어가 참신해. 재밌어.
이번 제안서 맡아서 써보면 어때?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 날 이사님이 책상 앞에 멈춰서서 모두에게 들릴만한 목소리로 말한다. 바로 옆자리에 팀장도 있고 과장도 있는데 말단 대리에게 꽂히는 시선이 적당히 기분 좋게 부담스럽다. 그날 이후 이 대리는 퇴근따위 욕심나지 않았다. 필자가 입사 1년만에 대리가 되고, 제안서를 홀로 쓰기 시작한 계기는 그랬다.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모두가 지켜보는 업무를 맡긴다. 그렇게 모두의 질투를 한몸에 받지만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매번 내게 맡겨지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리스크가 큰 프로젝트였다.
경력에 비해 볼륨이 큰 일
스스로에 대한 회사의 평가가 궁금할 때, 당신에게 맡겨지는 일을 냉정하게 살펴보면 회사 내 본인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능력에 부치는 큰 일을 맡게 되었다면, 상사의 신임과 책임감에 고무되기 전에 냉정하게 그 배경을 살펴보자. 마감일이 촉박하지 않은지, 이전에 거래가 없던 신규 고객과 첫 거래를 성사해야 하는 경우인지, 또는 누군가 맡았다가 포기한 일은 아닌지. 여러 시나리오가 있겠지만, 갑작스럽게 맡겨진 일이 경력에 비해 볼륨이 지나치게 크다면 대체로 일의 성패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경우이다.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뒷골목 건달 싸움에서 항상 소위 '선빵'을 날리는 사람은 일인자도, 이인자도 아니다. 그들의 턱짓 한 번이면 두 눈에 투지가 가득한 빡빡머리 남자가 제일 먼저 나선다. 그리고 이 투지 넘치는 엑스트라는 야심 차게 꼭 주인공의 얼굴을 노리다가 나가떨어진다. 그제서야,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물론 삼류 건달이 빅히트를 칠 수도 있다. 그렇게 한두 번 성공하면 이 '선빵'이 당신의 주특기가 되고, 회사는 다음부터 대수롭지 않게 당신을 맨 앞줄에 세운다. '이 대리는 이런 일 잘 하니까.' 과연 당신은 회사가 보내는 이 시그널을 몇 번째에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안전한 직장 생활을 위해 이런 '선빵' 자리는 피하는 게 상책일까? 어쩌면 이 선빵 기회는 빅히트로 마무리되고 모두의 영웅이 될 수도 있는데? 글쎄. 20년 차로서 말하자면, 야심 차게 한두 번 능력을 과시할 수는 있지만 이후로도 계속 같은 류의 업무만 맡게 된다면 조금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리스크가 큰 일들은 여러 차례 하다 보면 패턴이 보인다. 스스로의 능력치로 감당할 수 있을지, 성공 확률이 얼마나 될지, 어떤 추가 지원으로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을지.
무리 지어 사냥하는 것보다 외로이 초원을 가로지르는 표범이 되겠다면, 노련하게 빅히트를 준비하자.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지원사항을 얻어내고, 성공 확률이 낮은 일은 과감히 사양하기도 해야 한다.
회사가 신뢰하는 히트맨은 리스크를 인정하고 합리적 조율을 통해 성공 확률을 높이는 사람이다.
모두의 TMI
직장인은 회사에서 관계를 맺는다. 사내 인간관계는 동지애인지 전우애인지 모를 끈끈함이 있지만, 쌍욕을 해도 밉지 않은 고등학교 동창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런데 매우 드물게 모든 사람과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부장님과 점심 먹고, 이사님과 카풀하고, 인턴들이랑 티타임하는 다정다감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들. 상하 관계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소통하고 신뢰를 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늘 바쁘다. 회사 보안 시스템 비밀번호나 비상연락망, 임원진 가족사 등 시시콜콜한 사내 구석구석에 떠도는 조각 정보들까지 다 알고 있는 바람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갖가지 갈등 상황을 조율한다.
IT 기술에 어두운 20년 차 영업 직원들을 위해 영업 보고 양식을 엑셀로 정리해서 회람한다. 그리고 벌써 몇 년 전 전산화된 시스템에 본인이 손수 수기 입력한다. 처음엔 두세 명이었는데 한두 명씩 찾아와 묻기 시작하더니, 이제 당연한 듯 영업 보고를 본인이 받고 있다. 휴일에 창고 문을 열어줄 사람이 없다는 전화까지 받아야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본인도 모른다.
자율주행 자동차
당신은 그런 부류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가?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사회생활을 할 뿐이라고. 하지만 부장님의 걸어가는 뒷모습만 봐도 오늘 회의 시간 피드백이 라이브로 들리는데 어쩌냐고.
본능적으로 상대의 취향이 잘 보이고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승진이 빠르다. 상관의 마음을 읽고 상황의 흐름을 파악해서 늘 적재적소에서 딱 맞는 역할을 기가 막히게 해내는데, 어느 상관이 마다할까. 원하는 것을 직접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목적지가 입력된 자율주행 자동차처럼, 장애물과 변화무쌍한 교통 상황을 뚫고 정확히 그가 원하는 속도로, 원하는 경로를 따라 도로를 누빈다. 어느새 동료들이 넌지시 조언을 구하고 있다. '부장님은 공격적인 것 좋아하시려나?', '이번 워크숍에 비전 선포를 어떤 방식으로 하면 좋을까요?' 부서장이나 사장님 피드백이 절대적인 일들에 자꾸 당신이 배정된다. 왜일까?
관계 지향적인 당신은 회사의 여러 사람들에게 이미 찜꽁 당했다.
첫째, 상사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그의 생각을 꿰뚫고 자연스럽게 그들이 원하는 지향점을 구현할 수 있다. 게다가,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모호한 호불호부터 일일이 지적하기 겸연쩍은 디테일까지 '알아서' 구체화하는가 하면, 실무자들과 융합하고 조율하는 일에 능하다. 그러니 당연히 조직의 대내외적 협력, 조율이 필요한 일에 빠지지 않고 배정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물론, 다양한 사람들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고 누군가의 언어를 다른 누군가의 언어로 치환해서 전달하는 중간자가 되는 것은 에너지가 매우 소진되는 일이다. 더욱이 이런 사람들은 평판 관리에 예민하다 보니 스트레스 레벨이 더 높을 수밖에 없다.
당신을 아끼고 절약할 것.
당신이 그저 소진되지 않기 위해 단 하나의 노력을 권한다. 모두의 니즈를 매 순간 파악하게 되더라도, 그들의 필요에 본인의 노동력으로 답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당신은 흐름을 읽고 조율하는 사람이다. 어떤 업무에 누가 능하고 어떤 방향으로 갈지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당신의 통찰을 더 갈고닦아서, 그저 '착한 미라 씨'가 아니라 통찰이 있는 '박팀장'이 되기를.
